까칠한 화두를 놓고 밤잠을 설쳤다.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자신의 갑옷을 뚫은 미군 총알로 말미암아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지는 환영이 겹쳐졌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서 칙칙하게 달라붙는 그것들을 떼어 냈다. 자신은 죽어야 했고, 그러나 조선은 이겨야 했다.
육신을 죽여 혼신(魂神)이 승리하는 길. 자신의 죽음을 흔쾌히 전제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만 자신의 사멸 이후를 정리하는 일이 돌부리처럼 걸렸다. 머릿속을 꽉 채우는 아내와 피붙이의 아릿아릿한 잔상이다.
전투에 나서는 장수가 빠지지 말아야할 웅덩이가 있었다. 이승의 연분과 이별하는 일이 두려워 스스로 파놓은 연민 구덩이다. 패장의 치욕을 그들에게 물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재연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그 연민의 싹을 자르기로 했다. 그가 살아 있음에 거미줄같이 얽어놓은 이승의 인연을 걷어내야 했다.---8장. 강화로 가는 길
미국과 조선이 저마다의 체통을 걸고 한 판 전쟁을 벌이려 했다. 겉보기에는 꽤나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속 내막을 한 겹만 들쳐보면 한없이 나약해서 죽음이 두려운 하얗고 누런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동병상련의 고뇌에 절어 있었다.
해오라기란 놈이 강화도 논두렁에 사는 모양이었다. 아아악, 밤하늘을 자지러지게 들깨웠다. 해오라기 울음에 답하듯 가까이메숲진 곳에서 쫑쫑쫑, 날카로운 새소리가 들렸다. 먼 산사의 범종소리가 가늘게 잇대었다. 찰주소의 밤이 인경(人定: 밤 10시)을 넘어서고 있었다.---9장. 먹장구름
벼락이 꽂히듯 나타난 조선군이 검지로 화승총의 방아쇠를 감은 채 사나운 눈매로 틸턴의 이마에 총구를 정조준했다. 꿈쩍도 않는 서서쏴 자세였다. 틸턴은 그의 앞에 갑자기 솟구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범 포수 앞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조선군은 불과 7~8미터 앞에서 화승총을 들이대곤 마치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잇는 연장선에 틸턴의 이마가 얹혔고, 그가 조금만 움찔거려도 화승총 총구가 적확(的確)하게 따라붙었다. 조선군의 눈에서 분노가 출출 쏟아졌다. 틸턴이 그 눈총을 받아치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피스톨을 쥔 틸턴의 오른손이 벌벌 떨리며 손가락의 힘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