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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0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644g | 140*200*30mm
ISBN13 9788994300092
ISBN10 899430009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상엽은 미친 듯이 전철역의 계단을 뛰어가는 여자를 보면서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벌써 일주일째. 참 지치지도 않게 술 냄새를 풍기고, 빠지지도 않고 졸고 있다. 게다가 머릿속에 알람을 숨겨놨는지 때가 되면 용케 일어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지하철 문을 헤집고 뛰어나간다. 오늘 미적댄 걸 보면 어제는 진짜 숙을 독으로 부었나 보다.
저 여자…… 알래나? 내가 누구인지.
상엽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언제나처럼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는 그녀의 주먹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역시 여전한 술 냄새와 더불어 눌러쓴 모자, 삐딱하게 잠든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상대가 지난주,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란 걸 생각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주일 전, 그날을 생각하면서 상엽은 다시 한 번 피식 미소를 지었다.--pp.15~16

상엽은 진료 카드를 꼼꼼히 살펴봤다. 만 28세, 채송화.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채송화라는 이름을 갖기엔 그녀는 몸집이 꽤 컸다. 상엽은 목청 큰 여자임이 분명한 환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봤다.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에선 아까 소리치던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뜩 긴장한 손에는 눈에 익은 야구모자가 짓이겨지고 있었다.
오호, 역시나 신은 있다니까. 상엽은 픽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p.38

힘세고 목소리 큰, 야구모자 주인과의 짧고 유쾌한 시간은 어느새 잊혀졌다. 집에 도착한 상엽은 자기도 모르게 굳어지려는 얼굴의 근육들을 애써 이완시켰다. 집. 이곳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저 콘크리트 건물. 그는 육중한 철제문을 마주하고 답답하게 막혀버린 가슴에도 힘껏 숨을 들이켜 새로운 호흡을 주입시켰다. 집을 나와 독립한 후로는 어지간해서는 들르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내주는 다양한 여자들의 접근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엽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랭한 모습으로 그의 모친이 소파에 앉아 상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병원으로 여자 보내지 마세요.”--p.47

“야, 너 몇 살이야?”
“네?”
이제 와서 ‘네.’라고 해봤자다. 여태 참아왔지만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아니, 안 참아도 된다. 그녀의 도전적이고 전투심이 가득한 말투에 돌아서던 그가 설마 하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고 송화를 바라봤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의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속 쌍꺼풀이 얇게 진 검은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뜩이는 송화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너 몇 살인데 악착같이 반말이니? 공부 많이 한 놈들은 아래위도 없니?”--p.60

“이게 뭐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주문한 거 아니야?”
끙끙거리고 약 가방을 들고 내려온 송화에게 박 원장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거실에 있던 가족들의 시선이 온통 송화에게 집중되었다.
“언니, 언니는 얼마나 더 건강해지려고 거기다 약까지 지어 먹어. 지금도 언니 몸매는 충분히 위협적인데.”
장미의 어이없는 말에 송화는 소심하게 대꾸하고 인상을 썼다. 지금 문제는 익숙한 장미의 독설보다 독이라도 들어 있을지 모를 정체불명의 약봉지들이었다.
그 빌어먹을 의사는 먹고 죽을지도 모르는 독약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보낼 만큼 머리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p.62

“우리 사귑시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재빨리 앞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사귀자고……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지만 역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 인간이 미쳤나. 하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빛도 표정도 일단은 멀쩡해 보였다.
“장난하세요?”
“장난 아닌데요.”
“그거야말로 됐거든요.”--pp.70~71

윤상엽. 단 한 번도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 기억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그와 좋은 느낌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그저 무례함에 대한 응징과 피를 부르는 사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입 밖으로 내기에는 낯 뜨거운 경험들. --p.97

회사로 걸어가는 10분 동안의 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와 사귀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엽에겐 이번 만남이 두 사람의 운명일지 몰라도 송화에겐 그들의 의지였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영 개운치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무리 불편하고 내키지 않은 진실이라도, 감춰두었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란 걸 송화는 잘 알고 있었다.--p.105

첫 데이트에 지각이라니. 거기다 ‘당신’이라니, 또 거기다 ‘사랑’으로라니. 그것도 모자라 ‘이해’까지?
정말이지 예의 없고 생각 없고 뻔뻔하고 욕심 많은 남자였다. 아니, 사귀어 달라고 사정사정하던 때는 언제고 이리 늦는단 말인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례한 핸드폰의 문자를 단호하게 삭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은 또 어쩌란 말인가.--p.113

공사를 마무리한 것보다 더 기다려지는 건 그와 함께할 시간이었다. 일요일, 새벽부터 출발해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작은 자연 휴양림이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같이 오려고 했어.”
‘그 좋은 사람이 나예요?’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좋은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진심이야. 여기는 언제나 혼자 걷던 길이었어.”
상엽이 씨익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 여자 치고는 큰 손이라 생각했는데 이 남자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이 감싸지는 걸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그나저나 손을 잡혔는데 가슴이 뛰는 이유는 뭘까?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한데 여전히 그의 손길에 처음처럼 마음이 떨린다.
--p.156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 신데렐라의 속사정……

채송화는 어려서 엄마를 잃고 새엄마와 언니, 동생이랑 함께 살게 됐다.
딱 신데렐라 같은 상황인데, 왕자를 꼬실 수 없는 외모라니.
신이 장난을 쳐도 너무 심하게 쳤지만…… 어쩌겠나. 이대로 살아가야지.

새엄마는 집안 살림이라고 젬병인 미장원 원장님.
아빠는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 집안 살림에는 무심한 경찰서장.
피 한 방울 안 섞인 양지 언니는 잘나가는 변호사.
피가 반만 섞인 동생 국민요정 장미는 더 잘나가는 여배우.
나? 채송화는 씩씩한 건설회사 대리.
남들은 딸만 셋인 줄 알지만, 집에서는 아들 하나에 딸이 둘인 줄 알고 있다.

별반 이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지만 정의와 불의는 참지 못한다.
외할머니 말로는 더할 나위 없이 예쁘다는데, 거울을 보면 나조차도 ‘채 군’인 거 같다.
멀대같은 키에 통짜 몸매라니.
신데렐라가 안 되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시녀 근성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 그 남자의 우연……

아침마다 내리는 3호선 전철역. 상엽은 술 냄새 팍팍 풍기며 기대오는 남자(?) 때문에 학을 뗀다. 더욱이 이 남자, 비싼 양복에 침까지 흘려대며 자고 있다. 기겁을 해서 벌떡 일어선 상엽. 손수건을 꺼내 자기 옷을 닦아내며 문제의 남자를 쳐다본다. 모자를 눌러쓴 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술 냄새 풍기며 팔짱 끼고 눈 감는 남자를 보며 상엽은 얼핏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다. 설마 어제 화장실에서 만난 그 놈?

요즘 유독 술 냄새가 찐해진 지하철 3호선 3번 칸을 빠져나와 진료를 시작한 상엽.
익숙한 한약 냄새에 안도하지만, 그를 반기는 첫 번째 손님은 어머니가 보내온 어느 재벌 집 딸. 도대체 이 미친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어머니는 아직도 회사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 손님. 며칠 전 남자 화장실에서 상엽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던 그 남자(?)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어라, 차트를 보니 스물여덟…… 이 녀석, 게다가 여자였어? 왜 내가 가는 데마다 따라다는 거지? 혹시 어머니의 작전인가? 하다하다 안 되니까 이제 이런 방법까지 쓰시는 건가? 다행히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군. 그럼 시작해볼까? 죽도록 싫어하는 침을 놓는 건 기본이고 비꼬기로 시작, 반말, 안하무인을 거쳐 무시무시한 주문…… ‘아줌마’까지 꺼내가며 염장을 질러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호~~ 이 여자 생각보다 강한데?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일부러 상엽이 실실거리며 놀려대는 농담에 치료를 다 끝낸 여자는 마지막으로 소리를 빽 지르고 나간다.

“너 몇 살인데 악착같이 반말이야? 공부 많이 한 놈들은 아래위도 없니? 또 한 번만 나한테 반말하면, 그땐 너 나한테 죽-는다.”

반말 할 만해서 한 건데. 나이도 어린 게, 장난 아니네.
픽 하고 웃고 싶지만, 그러고 웃을 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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