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육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지식을 정리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직 그뿐, 새로운 지식 같은 것은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읽어 온 책을 내던지고, ‘세계’라는 큰 책을 가지고 배우는 수밖에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16세 때 학교를 떠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사색 생활은 외부 사람의 눈에는 미망(迷妄)의 생활로 보일 수도 있다.
어부는 대어를 기원하지만, 이런 일그러진 호기심의 소유자는 불행이라는 대어를 기원한다.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건을 일으키고 있지나 않을까, 추문은 없는가 하고 탐지에 열을 올린다. 일단 그런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가슴속에만 이를 파묻어 둘 수가 없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이를 알리고 싶어 한다. 따라서 수다쟁이가 된다. 하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들을 가지고 수다를 떨고 싶어서 이를 탐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벼파기의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호기심을 좀 더 즐거운 일로 향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런 즐거운 일로서 하늘, 지상, 공중, 바닷속의 사물을 열거하며 큰 것을 보는 것을 즐기는 성품이라면 태양을, 변화를 살펴보고 싶다면 달을 보라고 한다. 그곳에는 자연의 비밀이 잔뜩 있지만 자연은 비밀을 캐낸다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작은 것 보기를 좋아한다면, 식물을 관찰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에 악덕도 불행도 존재하지 않아서 흥미를 느낄 수 없다면, 그 욕망을 역사 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어떤 고전과의 만남에서도 같은 기분을 경험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 무렵에는 니체에 열중해서 그 이외의 책에 대해서는 전혀 읽을 마음이 없었다든지, 한때 마르크스에 사로잡혀 마르크스 이외의 사상가의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 가련해 보였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러한 열중의 자세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기간에 얻은 것이 결코 적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의 고전과 오래 접하기 위해서는, 너무 급격하게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찬성할 만한 의견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깊은 관계까지 나아갔을 때 그것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생각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결론을 성급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수상록』에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 인간상을 찾아내려 한다. 물론 그 비슷한 말을 찾아낼 수는 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적 무지와 대범함 가운데서 ‘단순하고 적당하게, 바꾸어 말하자면 자연스레 사는 법을 아는’ 인간이다. 무지와 대범함이 ‘즐겁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생적인 베개’임을 터득하고 있는 인간이다.
『성찰과 잠언』의 속표지에는, ‘우리 미덕 중 거의 모두는 변장한 악덕이다’라는 말이 내걸려 있다. 이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해서, 이는 매우 똑 부러진 표현이다. 이와 동시에 『잠언』을 되풀이해서 읽어 보면 알게 되는 것인데, 라로슈푸코의 생각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가면을 벗고 보여준 인간의 맨얼굴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변장도 하고 있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변장하는 일이 좀 더 교묘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상상은 좀 더 가공스럽다.
‘운명은 변전(變轉)한다.’ 그런 만큼 인간이 운명에 약점을 노출하게 되면 반드시 그 허점을 파고든다. 마키아벨리는 강물의 흐름을 예로 든다. 강물이 넘치면 강가의 둑을 파괴하고 범람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에게 저항할 방법이 없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평소에 둑을 견고하게 구축해서 대비해 놓으면 강이 범람하는 일도 없다. 운명 역시 이와 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아미엘의 고독과 고뇌는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위로를 의도한 고독은 가짜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시절에나,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인데,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시기에는 이것이 병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일도 있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우선 권력에 대한 동경이 있고, 이것이 성취되고 나면 조금 더 욕심이 우러나는 모양이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때면 실의에 빠져, 일종의 반동으로서 세상을 등지는 생활 쪽으로 동경의 방향을 튼다. 때로는 어느 날엔가 다시금 권력을 노릴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 위한 행위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때도 있을 것 같다.
권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등진다는 일에는 그 전제로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상을 등진다면 그것은 광인에 가까운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되풀이하지만, 천자문의 자구 해석으로 그치고 말 생각이라면, 여기서 굳이 이를 끄집어 낼 필요도 없다. 이는 모든 고전에서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올바로 해석을 해서 현대에 이를 살리는 일, 현대를 살고 있는 자기 자신 안에 어찌 살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고전을 진득하게 읽을 필요도 없게 된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편안한 시절이라면, 정(情)이 그대로 목소리가 되어 이를 불러도 안락하기만 하다. 하지만 난세에는 한(恨)의 기색이 여기에 실린다. 이는 정치가 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이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면 구슬픈 망국의 소리가 되고 노래가 된다. 그래서, ‘(정치의) 득실을 바루고,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감탄하게 하는 것으로서는 시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시의 효용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으면, 인간의 도덕관념을 높일 수도 있고 풍속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변화하게 마련이고, 어떤 한 인간이 생각하는 여러 갈래의 일들이 아귀가 들어맞듯이 깔끔하게 되어 나가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으레 그들 자신의 내부에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을 훌륭하게 논술하며 멋지게 구성해 놓아 결함이 전혀 없을 정도의 체계를 세워 놓거나, 아니면 그때그때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단편적으로 토로해서 다른 단편과의 모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하거나의 어느 하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단편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깨끗이 손을 들게 되면서도, 당장에 파브르를 떠나 『곤충기』를 닫아 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의 끈기와 호기심에 놀라면서도, 그처럼 그가 밝혀 놓은 것이 너무나 흥미로워 그것을 잊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다음에는 어떤 관찰을 할 것인가 하고 페이지를 들추는 손길을 멈출 수가 없는 거다.
루소는 사람들에게서, 단순히 공상과 몽상 같은 생각을 그려 보일 것이 아니라, 실행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요구는 실제로 모두가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을 제안하라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적어도 현존하는 악과 양립할 만한 선을 보이라’는 것이라고 미리 대답을 내 놓고, 절충주의로는 선을 왜곡할 뿐 악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했다.
미묘한 문학적 표현 때문에, 창조된 몽상이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면, 루소를 그가 처해 있던 시대로 가두어 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늘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 새로운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지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에 효과적인 수단을 조급하게 생각해 내려다가는 실패를 거듭한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유용성을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조금이라도 현명해져야 할 것이다.
사람은 종종,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지라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분주함의 대부분은 목적이 있으므로, 결국은 스스로가 바란 분주함이다. 우리는 바쁘게 일하는 양상, 혹은 활동한 결과를 필요한 사람에게 보여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바쁘신 것 같군요’라는 말은 찬사이며, 때로는 선망을 곁들인 말이어서,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고령의 노인에게 지금까지의 생애를 총결산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채권자, 애인, 윗사람, 아랫사람에게 빼앗겼던가. 이 말고도 부부싸움, 노예의 처형, 공공을 위한 일, 질병, 사용하지 않은 채 내동댕이친 시간도 여기에 덧붙인다. 이렇게 회상하고 보면, 기원 1세기 무렵의 인간과 20세기의 인간의 분주함의 내용은 약간 다르겠지만, ‘무익한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과, 끝 모르는 욕망과, 아첨이 곁들여진 사귐’이라는 눈으로 보면 똑같은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