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이론적 발전 덕분에 당대의 연구들에 편재하는 세계화라는 개념을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용어는 매우 이질적인 변형들을 하나로 묶고, 암묵적으로 세계경제가 동질화 과정을 거쳐 통합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할 것으로 가정한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다. 국제적 개방은 오히려 대조적인 특화들을 심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미국과 영국에는 국제 금융 중개가, 독일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는 혁신과 공산품 수출 주도 성장이, 프랑스와 스페인에는 포드주의 특화의 끈질긴 잔존이, 중앙유럽 및 동유럽 나라들에는 외국인 직접투자로 추동되는 산업적 동학과 석유와 원자재에 연계된 지대 수취 체제 등이 심화된다. _ 20쪽
조절이론은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본론』의 분석을 수정하거나 확장하려 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의 ‘근대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동시에 19세기 말 이래 ‘자본주의가 겪어온 변형’에서 끌어낸 교훈도 활용한다.
조절이론이 영감을 얻는 두 번째 원천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장기 역사다. 한편으로 이 장기 역사 속에는 국가는 물론 상인, 생산자, 은행가, 금융인 등 다양한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들이 녹아 있다. 이러한 변화들을 무시하고 어떤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_ 24쪽
현대의 다양한 제도주의 접근과 비교해 조절이론을 특수하게 만든 핵심 질문은 새로운 조절이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형태 전환을 보장하는 과정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변화는 본질적으로 내생적이다. 즉, 한 발전양식이 성공해 확산되고 성숙해가는 동안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대위기로 들어서게 만드는 힘들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제도의 성격이 국지적인지, 부문적인지 혹은 반대로 글로벌한지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대위기는 사회적 갈등이 정치 영역의 중개로 해소될 때 비로소 극복된다. 이 점은 예컨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이것이 세계경제에 미친 파멸적인 영향에 대해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이 보인 반응을 분석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적 공간(금융, 학계, 정부)에 소속된 집단적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이 열리고 대변형의 시기가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사회과학이론은 역사의 산물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_ 32쪽
화폐가 상품경제를 제도화한다면 화폐는 결코 상품경제의 산물로 볼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물물교환의 거래비용 상승으로 경제주체 스스로 화폐를 고안했다고 보는 신고전파의 우화 같은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사실 경제사를 살펴보면 민간화폐를 발명해 사용한 것은 상인들이며, 왕이나 군주는 자신의 영토에 유통하는 화폐에 법정 시세를 부여함으로써 그 주조권을 가로채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국민화폐들이 공공부채증서의 형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강조할 만하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또 다른 교훈은 다양한 민간화폐들 간의 경쟁을 토대로 한 은행 시스템은 어느 것이든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중앙은행이 창설되었다는 것은 위기나 심지어 붕괴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결제 시스템이 활력을 유지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상업적 이익의 논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공-옮긴이) 주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정부로부터-옮긴이) 독립된 기관으로 간주되는 현대의 중앙은행조차 그 지위는 여전히 정치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화폐체제’(개방경제에서는 환율체제를 포함)의 선택은 ‘반드시’ 정치 영역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_ 55쪽
조절이론은 국가의 행동을 결코 전일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의 여러 부처들 사이에 상호 대안적인 원리들을 두고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법을 노동법보다 우선시해야 할까? 사회보장 재원 조달에서 조세의 기여분과 노동자 및 기업가의 기여분을 어떻게 배분할까? 법적·정치적 평등이 기업 차원의 산업민주주의 원리와 같이 갈 수 있을까? 정치권력은 이토록 많은 질문에 그때그때의 상황과 세력관계에 따라 답변을 달리한다. 이처럼 제도 형태와 국가 역할 사이에는 강한 상호 의존성이 존재하며, 이는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이 상호 중첩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_ 58쪽
‘조절’이라는 용어가 주는 함축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조절이론은 거의 안정된 축적체제와 위기를 동시에 다룬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조절이론은 마르크스주의 관념은 물론 고전파의 관념과도 구별된다. 마르크스는 축적이 본성상 경기변동을 동반하며, 성장의 국면과 산업위기 또는 금융위기를 통한 조정 국면이 주기적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는 위기는 조절이론이 말하는 위기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고유한 모순들(집중의 심화, 이윤율 하락 등)로 인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를 말한다. _ 67쪽
조절이론의 개념들은 특정 조절양식과 축적체제의 ‘작동’을 보장하는 요인은 물론, 이것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도 함께 고려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 이 점은 조절이론이 다른 현대 거시경제학 이론에 비해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절이론은 아날학파로부터 영감을 받기는 했지만, 경제사 연구를 단순히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위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를 유발하는 몇 가지 ‘기본 메커니즘’을 해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위기들은 특정의 추상 수준에서는 불변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_ 110쪽
조절이론은 처음부터 위기 분석을 핵심 과제의 하나로 삼았다. 포드주의 성장체제의 탈선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된 연구는 대위기의 계기적 출현의 역사를 집중 분석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1980~1990년대에 위기들의 끊임없는 반복과 그 독특성에 놀란 경제학자들은 다시 위기에 주목했다. 금융위기를 정식화하고 위기의 역사를 다시 고찰함으로써 수많은 결론과 직관이 얻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절론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그 독창성을 견지해왔다. _ 141쪽
두 번째 일반적인 교훈은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 동학이 갖는 특징의 규명과 관련된다. 자유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관찰자들이 미래에도 시장 영역이 연속적으로 확장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역방향의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말하자면 경쟁 메커니즘의 활력 유지에 불가결한 새로운 제도적 장치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 분업을 비롯한 분업의 심화뿐만 아니라 혁신, 다양한 생산부문, 사회보장, 환경 등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복잡성 증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_ 213쪽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공황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막대한 개입을 해왔다는 사실은 정치 영역이 경제 영역에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조절이론은 이 두 영역의 착종이 정치경제체제의 생명력을 보장하는 조건임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역설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이 진술은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표현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본주의 동학을 고려한 개념화 노력이 가져다준 성과다. 체제가 가변적이며 또 정치 조직에 의존됨을 보여줌으로써 조절 연구는 하나의 공간을 열어젖혔다. 이 열린 공간에서 민주주의의 실현과 대위기의 시기에 가능한 대안 모색이 다양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_ 252쪽
조절이론은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체제의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 약점과 강점은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자본주의의 진실한 속성은 신용을 비롯해 상응하는 수단을 동원해 미래에 아이디어를 투사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유발되는 모순과 불균형은 위기로 귀착되며 그중 가장 심각한 위기들은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지리적 기반을 확장하고 사회에 대한 지배를 심화시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을 찾아냈다. _ 299쪽
자본주의의 모순적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자. 자본주의는 새로운 공간을 정복한 후 먼저 자본주의를 강화시키지만, 이는 결국 전례 없이 복잡한 위기로 귀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가 상실한 영향력을 그 대신 행사할 어떤 정치권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_ 345쪽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