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너의 마음이 북쪽의 빙원으로 달음질쳤다. 출항하면 그도 틀림없이 위대한 경이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일각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앨버트로스, 북극 바다제비, 북극곰. 섬너가 엄청난 크기의 참고래들이 잠잠한 빙상 아래에서 납빛 먹구름처럼 떼 지어 유영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목탄도 준비됐겠다, 이 모든 걸 스케치하기로 했다. 수채 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지도 작성해야지. 왜 아니겠어? 섬너는 시간이 많을 터였다. 브라운리가 이 점을 명토 박아 줬다. 섬너는 폭넓게 책을 읽을 요량이었고(모서리가 잔뜩 접힌 호메로스도 가져왔다) 까짓것, 안 써서 다 잊은 그리스어도 연습해야지. 씨발, 못 할 게 뭐야? 섬너에게 다른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물론, 가끔 설사약을 나눠 주고, 또 사망 진단도 하기는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면, 포경 항행은 일종의 휴가였다. (……) 광란의 인도 전선에서, 더위와 추잡함, 잔혹한 만행, 지독한 악취에서 빠져나온 섬너. 그에게는 바로 이런 여행이 필요했다. 그린란드에서 고래를 잡는 일이 어떻든 간에, 설마, 인도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이, 섬너의 판단이었다.
--- p.45~46
「그런데, 그 아일랜드 의사는 어디에다 쓰게요?」
「섬너?」 백스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싱긋 웃었다. 「내가 왜 그놈을 데려왔겠어? 한 달에 2파운드, 그리고 톤당 1실링. 대충 그 정도 액수. 뭔가 냄새가 나, 틀림없어. 그래도,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놈이 우리랑 마찰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틀림없지.」
「삼촌 죽었다는 얘기는 믿어요?」
「아니, 전혀. 자넨 믿나?」
--- p.50~51
섬너가 다시금 있는 힘을 다해 왼손을 내리누르자, 조금 더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팔꿈치가 중심축으로 사용됐다. 섬너가 순간, 몸의 자세와 균형이 적절하며,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누르고 있던 부빙이 갑자기 옆으로 움직였다. 섬너의 오른쪽 팔꿈치가 미끄러져 돌아갔고, 그의 턱이 부빙의 예리한 모서리에 꽈당 하며 세게 부딪혔다. 짧은 순간 쳐들린 시선으로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하얬는데, 눈발 때문인지 꼭 써레질을 해놓은 것 같았다. 그는 가망 없는 상태로, 멍하고 아찔하기만 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물이 섬너를 집어삼켰다.
--- p.78
드랙스가 캐번디시를 옆으로 밀치고, 폭 8인치의 고래 끌을 측방 시렁에서 빼냈다. 북극곰이 보트를 마다하고, 허우적거리는 노잡이한테로 달려들었다. 곰이 노잡이의 팔꿈치를 물고 거대한 목을 뿌리치듯 흔들자, 불행한 노잡이의 오른팔이 거의 다 찢겨 나갔다. 드랙스가 여전히 좌우로 요동 중인 보트에서 똑바로 섰다. 그가 고래 끌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북극곰의 등을 세게 내리찍는다. 일순 저항하는 느낌이 왔지만, 곧이어 곰이 어쩔 수 없이 굴복했고 상황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고래 끌의 강철 날이 곰의 척추를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다. 드랙스가 고래 끌을 빼냈다가, 다시 찔렀고, 또다시 찔렀다. 타격할 때마다 칼날이 더 깊이 박혔다. 드랙스의 세 번째 공격에 곰의 심장이 뚫렸다. 엄청난 양의 보라색 피가 수면으로 솟구치면서 김이 났다. 곰의 덥수룩한 하얀 털가죽이 먹물을 뿌린 듯 얼룩졌다. 훅 하고 밀려드는 공기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드랙스는 이 일이 즐거웠다. 짜릿한 흥분은 물론이고, 그는 장인의 자부심마저 느꼈다. 드랙스는 죽음이 일종의 형성, 다시 말해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것이, 그는 죽음이라고 믿었다.
--- p.127
「잔인무도한 사건이야.」 브라운리가 말했다. 「자넨 그런 사건 소식을 들은 적이 있나? 여자애라면 또 몰라. 여자라면 어떻게 이해해 보기라도 하지. 씨발, 사환은 아니잖아. 젠장, 절대로 아니지. 우리는 사악한 시대를 살고 있어. 안 그런가, 캠벨? 악이 횡행하고, 변태들이 득실거리는.」
캠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말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북쪽 바다에 할애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캠벨이 싱긋 웃었다. 「아마도 냉기와 한기를 싫어하실 것 같네요.」.
--- p.195
캐번디시가 등과 도끼를 내려놨고, 이제 두 남자가 합세해 통을 치웠다. 이윽고 그들이 배의 맨 아래 바닥에 섰고, 우현 이물의 목재가 대부분 드러났다.
「네가 안 가라앉히면 안 가라앉겠는데, 마이클.」 드랙스가 말했다. 「봐.」
캐번디시가 고개를 가로저었고, 도끼를 들었다.
「씨발,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어.」 그가 말했다.
드랙스가 뒤로 물러나, 캐번디시가 도끼를 휘두를 여유 공간을 확보해 줬다. 캐번디시가 고개를 돌려, 드랙스를 바라본다.
「이런다고 나한테 의리를 기대하지 마.」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