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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읽는 한국사

전쟁으로 읽는 한국사

황원갑 | 바움 | 2011년 10월 1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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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한국문화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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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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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년 10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560g | 153*224*30mm
ISBN13 9788958830948
ISBN10 895883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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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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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조한전쟁이 끝난 뒤에 승전국인 한나라의 장군 순체는 참형을 당했고, 양복은 죽임은 면했지만 서인이 됐다. 위산과 공손수는 전쟁 중에 이미 목이 달아났다. 반면 항복한 조선의 태자와 대신들은 모두 제후로 봉함을 받았는데, 그 지역이 모두 고조선제국의 영향력이 미쳤던 발해만 연안과 산동반도였다. 『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참을 봉하여 홰청후를 삼고,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부친이 죽고 공이 크므로 온양후로 삼았다. 좌장군 순체를 불러들여 그가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를 물어 저자에서 목 베어버리는 기시에 처했다. 누선장군 양복도 군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러 좌장군을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으므로 죽여야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목숨을 살려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기네 장수들은 모두 죽이거나 서인으로 강등시킨 반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조선의 태자와 대신들은 모두 제후로 삼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한이 조한전쟁에서 무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내부분열 탓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지 한나라 장수들이 잘 싸워서 전쟁에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한전쟁」중에서

광개토태왕은 재위 22년간 64개 성, 1,400여 촌락을 공취하며 서쪽으로는 요하,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 북쪽으로는 숙신,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지역에 이르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 이래 최대의 영역을 개척했다. 광개토태왕은 전쟁만 잘한 제왕이 아니었다. 그는 고구려 사상 최강의 정예군을 육성한 탁월한 전략가이기도 했지만, 내정에도 힘써 행정과 군사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토록 했다. 또한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나라의 사당과 종묘를 수리하여 고유한 신앙체계를 정비했는가 하면,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교를 통해 백성들이 정신적 안정을 찾도록 세심하게 배려할 줄도 알았다.
일세의 영걸 광개토태왕은 재위 22년째인 413년 10월에 세상을 하직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아까운 39세였다. 한창 일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에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떴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은 필자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광개토태왕이 그처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도 어쩌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이 겨우 40세에 세상을 떠난 것처럼 갑작스럽게 병사(病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제국 고구려의 성세를 천하에 떨친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대왕은 그 이듬해인 414년에 부왕의 훈적을 기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한 석조 능비를 국내성 태왕릉 동쪽에 건립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유명한 길림성 집안시 대비가의 광개토태왕훈적비, 줄여서 호태왕비이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중에서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전쟁의 원리. 일당백의 투혼과 기백으로 버티던 결사대도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밀려 벌판 여기저기에서 살점을 가르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오장을 쏟으며 백제군은 5,000이 3,000으로 3,000이 1,000으로 1,000이 100명으로 줄어들어갔다. 좌군은 황령산성에서 밀려 시장골(屍葬谷)에서 전멸하고, 우군은 모촌리산성에서 밀려 충곡리(忠谷里)에서 전멸하고, 계백의 중군은 황산벌을 가로질러 청동리산성 아래서 전멸을 당했다. 7월 10일 온종일 걸린 싸움에서 5,000 결사대는 처절하게 학살당하고 계백 또한 충장산·충훈산으로도 불리는 수락산 아래서 전사하니 계백의 최후는 곧 백제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5,000 명 중에서 가까스로 참살을 면해 포로가 된 자가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 등 20여 명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돌이켜보건대 반굴과 관창 신라 소년 화랑의 용기도 가상하지만, 전투중인 그 같은 시급하고 절박한 극한상황 아래서도 적의 용장한 기상을 사랑하고 아껴서 살려 보낸 계백 장군이야말로 참으로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도량 넓은 대장부요 민족의 거인이라 하겠다.
또한 황산벌전투 하나만 두고 볼 때에도 계백이 김유신보다 탁월한 장수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만 결사대였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허약한 5,000명의 군세로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5만 대군을 맞아 4전 4승을 거둔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김유신이 김반굴과 김관창 등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고육지책을 쓰지 않았고, 계백에게 만일 군사들을 보충할 여유가 있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틀림없이 달라졌므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도 없으니 어찌하랴. 이 황산벌전투가 계백군의 장렬한 전몰로 끝나고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123년간의 영화를 자랑하던 백제의 도성 사비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낙화암·대왕포의 한 맺힌 전설을 남긴 채 700년 백제사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백제망국전」중에서

삼별초(三別抄)는 민족 정통성을 지키려는 고려의 주체적 자주 독립 정신의 표상이었다. 삼별초는 몽골군에게는 항복만이 살 길이란 법칙을 용기 있게 거부했던 고려 정신의 진수였고 귀감이었다. 배중손(裵仲孫)은 굴종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용사였다. 삼별초 장군 배중손은 비굴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이 일어서서 꿋꿋하게 싸우다가 죽기로 작정했다. 전남 진도 벽파진·용장산성·남도석성 등은 배중손 장군이 용감하고 날쌘 특수부대 삼별초를 이끌고 끈질기게 피 어린 항쟁을 지속하던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으리으리한 왕궁의 건물이나 성벽, 기념비만이 역사의 흔적이 아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도, 왕후장상들의 것만도 아니다. 폐허가 된 고성(古城)의 성돌 하나하나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숨져간 숱한 백성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배중손은 비록 칼로는 졌으나 주체를 위한 항쟁의 깃발을 힘차게 높이 올린 빛나는 정신으로써 영원한 승리를 거둔 멋진 사나이였다. ---「삼별초 대몽항쟁」중에서

동학군이 공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22일(양력 11월 19일). 전봉준은 1만여 대군이면 공주쯤이야 능히 점령할 것으로 여겼으나 단 하루의 시간을 허비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으니, 그 전날 신식무기로 완전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이 먼저 도착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7일간에 걸친 공주 우금치(牛禁峙) 공방전은 40여 차례의 접전으로 시산혈해의 지옥도를 이루었다. 새 시대 새 세상을 열고야 말리라는 동학교의 신앙심을 내건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고, 천주의 조화 가호를 빌며 어깨마다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적을 붙인 동학군은 군가 대신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주문을 소리 높이 외며 돌격했으나 한 번 시운(時運)을 잃으니 영웅도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우금치싸움에서 1만여 병력은 3,000명으로 줄어들고, 다시 500으로 줄어드니, 이로써 동학의 죽창은 마침내 부러지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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