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차면 넘치고 넘치면 흘러가 버린다.
그저 정신없이 흘려보내고 흘러가다가
인생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잠시 여기 옛 선비와 함께 주변과 사물과 공간을 붙들고
시간에 넉넉하게 고여 보는 건 어떨까?
---「머리말」중에서
‘명(銘)’이란 삶을 함께한 물건을 노래한 글이다. 온갖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풍요와 소비의 시대에 저자는 옛 선비들이 남긴 명을 곱씹으며 주변의 것들을 천천히 돌아보고 음미할 것을 권유한다. 짧지만 강한 여운을 주는 명문(銘文)과 이해를 돕기 위해 곁들인 평설을 통해 우리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했다.
1. 가족과 벗, 일상
떡을 반죽해서 기름에 튀기고 ?餠油煎
쌀을 볶아 꽃송이처럼 만들어서 熬稻成花
엿을 발라 곱게 붙여 내니 飴?粘著
노인을 봉양한다는 명분, 아름답구나! 養老名嘉
무엇으로 그것을 담아냈는가 何以包之
버들을 잘라 만든 그릇이라네 ?杞爲器
낮이고 밤이고 無夙無夜
생각날 때마다 집어 먹으면 任?隨意
몸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니 扶將有力
여기에 의지해 여생을 보내 보리라 聊以沒齒
이익(李瀷, 1681~1763), 「상진권명(常珍?銘)」, 『성호전집(星湖全集)』
이 명에는 짧은 서문(序文)이 곁들여 있다. 이익에게는 채씨(蔡氏) 성을 가진 며느리가 있었는데, 이 며느리가 유독 시아버지에게 살가웠던 모양이다. 항상 산자(?子)를 만들어 작은 나무 그릇에 담아 시아버지 자리 옆에 두고 드시게 했다고 한다. 그 마음이 곱고 예뻐 며느리가 과자를 담아 내오는 그릇에 ‘상진권(常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명을 지었다. ……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관계련만 서로 마음으로 닿으면 이렇게도 아름다워진다. 과자 하나로도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진심, 혹시 주위에 껄끄러운 이가 있다면 달달한 과자 한 그릇 마련해 봐도 좋지 않을까?
---「마음으로 빚은 과자를 담나니」중에서
2. 옛글 옛사람, 풍류
어른 계신 자리에서 비질할 때는 以?以袂
소매로 가리고서 쓸어 담아야 하니 拘而投之
대수롭지 않은 예절이라 깔보지 말고 毋曰疏節
부지런히 힘써서 익혀야 하리 ?焉習之
윤기(尹?, 1741~1826), 「지기명(紙箕銘)」, 『무명자집(無名子集)』
이 명은 소학 과정 중의 하나인 청소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린이에게 종이로 쓰레받기를 만들어 주고서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는 것이다. 예(禮)에 대한 주석서인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편에 “어른이 계신 자리를 청소할 때는 반드시 빗자루를 쓰레받기 위에 올려서 들고 가야 하고, 비질할 때는 소매로 에둘러 막고서 뒷걸음질 치며 쓸어 담아서 먼지가 어른에게 날리지 않게 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 청소하는 데도 예절이 필요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몸에 익어 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관계 맺는 자세와 방법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공부와 생활은 별개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교육이 다시 생활을 눈여겨보아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쓰레받기 쓰는 예법」 중에서
3. 역사의 길목, 세상의 표정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爲善斯福
인을 행하면 장수하는 것 行仁斯壽
이 베개 좀 베고 잔다고 惟玆之枕
어찌 도움 받을 수 있으랴 何能有佑
김낙행(金樂行, 1708~1766), 「수복침명(壽福枕銘)」, 『구사당집(九思堂集)』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을 들추고 베개 자리를 잡던 지은이 김낙행의 눈에 베개 양 옆면에 수놓은 ‘수’ 자와 ‘복’ 자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이렇게 내뱉었을 것이다. “이런 글자 좀 새겨 놓는다고 장수하고 복 받는다면 그리 못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김낙행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기도 하다. …… 김낙행은 아버지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내내 그 곁을 지키며 평생 벼슬하지 않았다. 옳다고 믿는 것을 옳다고 하다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스승이 불운을 겪은 것이다.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10년을 보낸 지은이가 세상에 화도 나고 운명이 한스럽기도 하던 어느 밤 문득 베개를 물끄러미 보며 자신을 다잡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베개로 수복을 빌어 본들」중에서
4. 별난 시선, 색다른 이야기
나무 자르고 남은 그루터기에 株伐根餘
우레와 빗물이 엉기더니 雷雨?之
예전에 희미하던 것이 이제는 나타나 古晦今顯
물건의 형상을 이루었네 物類形之
아둔한 장인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族工不顧
명철한 장인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哲工解之
속인은 취하지 않았지만 俗子不取
군자는 이것을 사랑하였네 君子愛之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후목연갑명(朽木硯匣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갑(匣)은 물건을 넣어 두는 작은 상자이다. 이덕무에게는 벼루를 담아 두는 갑이 하나 있었다. 나무로 만든 갑은 전체적으로 노란 빛깔을 띠었는데, 거기에는 먹으로 그려 놓은 듯한 가늘고 검은 문양이 있었다.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에 빗물이 스며들어 썩기 시작하면서 그런 문양이 만들어진 것이다. 썩은 것이 되레 아름다운 무늬가 되다니, 세상의 길흉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세상을 살며 결여나 실패, 그로 인한 상처를 경험하지 않는 인생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과 삶에 대해 제대로 배운 사람은 결여와 실패, 그로 인해 겪은 쓰라린 상처가 인간의 내면에 무한히 아름다운 문양을 빚어낼 수 있음을 안다.
---「썩은 나무도 사용하기 나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