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1860·1870년대 전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조선백성의 두만강(및 압록강) 북 중국과 러시아 경내로의 대규모 이동이라는 배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본다면, 길림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동시에 중국(길림)과 조선, 그리고 러시아(연해주) 사이에서 변경 지역의 개발과 유지를 위한 노동력, 특히 이 경우는 농경민으로서 그 자질이 높이 평가되는 ‘조선백성’에 대한 쟁탈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116 또한 이 때문인지 길림 측은 이 단계에서는 경계(국경)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든 자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 p. 108
이 일을 통해 조선과의 외교·통상 등에 관련된 대부분 사무가 예부를 배제하고, 총리아문-북양대신 계통에서 처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대조선 외교통로의 전환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1881년 초 총리아문이 전통적으로 예부가 조선 관련 업무를 담당해 왔지만 예부에 공문 왕래를 맡기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일처리 과정에서 기밀도 누설되기 쉬우므로 앞으로는 양무(洋務)에 관한 긴요한 건은 북양대신과 주일본공사가 조선과 직접 문서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권도하되 수시로 그 처리상황을 총리아문에 알리게 하여 번거로움을 피하겠다고 주청하여 이를 비준을 받았던 것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것은 사실상 조선에게 서구 각국과의 조약 체결을 유인하기 위해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조선정책을 전담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1882년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의 의정(議定)과 더불어 시작된 사실상 조선에 대한 청조의 적극적인 개입 방침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 p. 207
조선 측으로서는 여전히 정계비가 가장 강력한 ‘국경’의 증거로 생각되었던 만큼 그 부분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러한 옛 기록의 확보를 통해 정계비가 의심스럽다거나 옮겨졌다는 중국 측의 의문을 해소하는 효과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정계비가 ‘송화강 발원지’ 에 세워졌는가 하는 ‘곤혹’스러움이 해소될 수는 없었으므로 ? 이중하도 이 수수께끼에 한 발 더 접근한 것은 앞서 서술한 대로 공동감계가 끝나고 장계로 보고서를 올린 다음이었다 ? 이후에도 중국 측은 여전히 정계비의 신뢰성을 부정하거나 이설론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공동감계·국경회담에서 이 점은 여전히 중국 측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중하가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무더기를 쌓았지만, 그것이 두만강의 발원지와 이어지지 않으니, 반드시 산과 물줄기 사이에 따로 경계를 세워야 한다”, “이곳을 교계(交界)로 고집하여 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사실상 토문강경계론을 포기한 제안(「別單草」)을 하였고, 나아가 “토문강과 두만강은 같은 강이기 때문에 사실상 두만강이 양국의 경계가 된다.”라고 보고하였던 내용(「追後別單」)이 중국에 보내진 조선정부의 공식 입장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조선 측에서 취한 일종의 외교적인 ‘협상전략’의 일환(또는 정부 내 이견의 존재)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이전에 ‘잘못’이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게 된 것은 감계·회담의 출발점이 된 조선월간민 안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없었던 것이 아마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하의 주장대로 ‘양보’를 하여 두만강을 양국 간의 국경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을 조선정부의 뜻대로 안치하거나 쇄환시킬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측은 중국 측에서 “원근과 방향을 알지 못해 두만을 토문으로 잘못 섞어 부르는 것이며, 그 [중국어] 발음이 우연히 비슷해서 같은 강으로 생각한 것”이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해당 지역(두만강 북의 월간지역 ? 인용자)은 예전부터 백성들에게 허락된 땅이 아니었는데, 근래 유민들이 몰래 들어와 농사를 지어도 조선관리들이 수시로 순찰하여 쫓아내서 금지시키지 못한 것은 조선의 책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생업을 되찾게 하는 것이 실로 필요”하므로, “책봉 받은 것 외에는 감히 털끝이라도 침범할 수 없지만, 아울러 책봉을 받은 경계 안의 작은 땅 역시 조심스럽게 지킴으로써 작은 나라를 돌봐 주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 성조 강희황제의 지극한 인덕(仁德)을 저버릴 수는 없다.”라고 버티는 입장을 취하였다. 정계비를 세운 강희제의 ‘인덕’을 근거로 기존의 토문강 경계론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입장을 선택한 것이다. --- p. 277-279
청정부가 지금까지 이 문제를 사실상 중국·조선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길림·조선 사이의 문제로 한정하여 다루어 왔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어쩌면 길림 측에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을 떠넘기는 것이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을수를 대도문강으로 설정하면서 다시 관원의 파견과 감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법이 도저히 조선 측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에서 길림 측이 분명하게 확인한 바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제3차 공동감계를 길림장군이 최종 대안으로 제기한 것은 결국 누구도 책임지고 이 문제해결을 위한 ‘결단’을 내리려 하지 않았던 데에서 나온 결과이다.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에서 청조가 여전히 ‘천조상국’으로서 조공국인 ‘속방’에 대해 ‘자소지의(字小之義)’를 지키고자 하는 외교적 방침을 고수하는 한, 그리고 조선 측이 이러한 중국의 태도에 기대어 양보와 시혜를 계속 기대하는 한, 이러한 분쟁은 결국에 가서는 청 황제나 길림장군의 ‘결단’이나 ‘양보’가 아니면 풀릴 수 없는 난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일단 ‘토문강’이 아닌 ‘두만강’(도문강) 선으로 국경이 설정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으므로, 중국 측으로서는 굳이 그러한 결단과 양보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도 아마 이러한 ‘유예’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p. 397-398
주지하듯이 조선백성의 이 지역에 대한 진출은 이 무렵은 단지 시작 단계를 거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청일전쟁이나 의화단 사건 등 국제적인 격변을 거치면서 만주지역은 그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게 되었다. 길림 지역의 정세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에 따라 조선백성의 월경·이주나 그에 따른 토지소유권, 호적 내지는 국적의 문제 등은 이후에도 여전히 길림당국이 마주쳐야 할 수많은 과제를 낳게 되었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에 따른 청의 국제적 위상 추락, 의화단사건을 틈탄 러시아의 만주 점령, 나아가 한국 지배를 노린 일본의 개입으로 ‘간도문제(間島問題)’가 불거지면서 이를 둘러싼 국경·영토문제는 이제 단순하게 청과 조선 양국 간의 문제가 아닌 훨씬 복잡한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 p. 472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 역시 바로 그러한 전사(前史)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시기가 되면 청일전쟁 이후 조선-청 관계의 재편이 이루어지면서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을 강력하게 규정하였던 ‘사대-자소’ 질서와는 전혀 다른 만국공법에 의한 근대적 영토·국가 관념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분쟁이 다시 재연되기 때문이다.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을 통해 양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논리와 근거를 끊임없이 찾아서 제시하였던 것처럼, 이후에도 새로운 상황과 배경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논리가 모색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두만강 북안의 ‘간도’를 둘러싼 국경분쟁은 전혀 새로운 양상·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p. 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