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조금이나마 그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다가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테르와의 관계에서는 조금 복잡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가족 앞에서 겉치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극도로 피곤한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페테르가 원하는 사랑스러운 아내 혹은 우리 아이들이 가져야 마땅한 어머니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쌓아 왔던 인생을 포기하는 것, 그 방법뿐이었다. --- p.17
프레드는 모든 것을 말할 계획이었다. 레오나에게. 프레드는 천천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본 하늘도 그랬다. 그 하늘을 프레드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제 밖에서 하늘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프레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피부에 닿는 바람도, 얼굴을 적시는 빗방울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태양에 눈이 부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프레드 시에스트룀은 암에 갉아 먹힌 채 누워 있었다. 두 다리는 날아갔고, 몸에는 폭탄이 남긴 파편들이 가득했다. 진통제의 효력이 떨어지는 즉시 시작되는 엄청난 통증은 프레드를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은 없었다. --- p.87~88
신원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일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느 누가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지우고 모든 연락을 끊은 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 원하는 젊은이들, 또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군대라는 곳이 매우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알겠다. 한편으로 전쟁터에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각오하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극도로 자극적이기도 하니까. --- p.168
코펜하겐의 지리는 잘 알지 못했지만 차가 도심을 빠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순간, 공포감이 다비드를 엄습했다. 어쩌면 시몬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다비드를 죽이기 위해 국경을 넘으라고 지시한 것은 아닐까. 스톡홀름에서 전달받게 될 자동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받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전달받을 자동차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운송도. 아무것도. 그저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죽임을 당할 일만 남았을지도. 다비드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사가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경찰을 위해 일을 했다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선과 정의, 법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 p.273~274
“머리 들어.” 베아트리세에게 말하며 머리에 묻어 있는 거품을 헹궜다.
아이의 등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거품이 사라졌을 때였다. 아이의 피부에서 여러 개의 자국들이 보였다. 파란 멍 자국. 소름이 돋았다. 어쩌다가 이런 게 생겼단 말인가.
“아가야, 등에 이게 뭐야?”
등뿐만이 아니었다. 어깨에도 보였다. 앞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몸 전체가 깊은 상처투성이였다. 아이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시뻘건 핏물이 흰 거품에 뒤섞이고 있었다. --- p.326
“뭐, 우리는 인간이니까 화를 내기도 하지. 하지만 분노는 우리의 행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지. 발이나 발가락을 의자 혹은 식탁 다리에 부딪쳐본 적이 분명히 있을 거야. 정말로 아프지. 이렇게 되면 즉각 아드레날린이 우리 몸에 분비돼. 화가 나서 발로 차버리고 싶어지는 거지. 의자나 식탁이 뭔가를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래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야. 그리 똑똑한 행동은 아닌 것 같지? 그렇지만 우리 인간들은 가끔 그래.”
--- p.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