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왜 오셨습니까?”
“너랑 춤추고 싶어서 왔지.”
“후…….”
아르하드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이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파티는 귀족들과 초대받은 자들만 참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민인 당신이 어떻게?”
아르하드가 작게 속삭였다.
“시골 귀족인 칼리스토 자작의 양아들 신분으로 들어왔어. 내내 평민이었다가 얼마 전 귀족의 양자가 되었다, 라는 게 지금의 내 설정이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거짓말이지.”
설마 오늘 여기 들어오려고 양자 자리를 산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설마라는 단어는 아르하드 이 남자에게 대입할 수 없다. 확실하다. 이아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몸을 사려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티도 안 난다.”
“그 얼굴로 그런 말을 잘도 하시는군요. 지금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칭찬으로 듣겠다며 이아나의 가시 돋친 말을 부드럽게 넘긴 아르하드가 손을 내밀었다. 이아나는 제 손이 얹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하얀 장갑을 내려다보다가 아르하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로브 밑의 의상은 푸른색으로 포인트를 준 검은 정장이었다. 적당하게 달라붙어 드러난 탄탄한 몸과 긴 다리의 선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가 입은 깔끔한 정장은 다른 귀족들이 입었다면 너무 단출하다는 이유로 흠이 될 수 있었지만 그 옷을 입은 게 아르하드라서 모든 단점이 사라졌다. 이마 위로 결 좋게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무게감 있게 가라앉은 금안, 짙은 눈썹과 권태로운 눈매.
아르하드를 이루는 굵은 선들은 한 남자의 오만하면서도 귀족적인 인상을 그려 내었다.
‘아.’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편한 복장도 학술원의 교복도 아닌 정복을 차려입어 누구보다 귀족 같은 그를 마주한 순간 이아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렇다, 이 남자는 저와 둘이 있을 때는 한없이 허술한 모습을 보이지만 누구보다 고귀하고 오만했던 북국의 황제였다.
“이아나.”
간절하게 이름을 부르던 적국의 군주. 제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검은 사내가 있었다. 그 남자는 눈앞의 남자와 똑 닮은 얼굴로 그에게 오라고 간절하게 회유했다.
삼 년간의 회유와, 슈나이더가 제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바하무트 제국의 전쟁. 그리고 칠 년…….
“이아나, 너는.”
전장의 피비린내가 풍겨 온다. 잔인하게 병사를 베어 넘기는 끝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피보라 속의 그 남자가. 말라붙은 피처럼 까맣지만 황금의 만월처럼 우뚝 섰던 그 남자가.
이지러지고 문드러지는 감정을 내비치며.
“이아나, 네가 대체 뭔데.”
그를 찌를 듯이 노려보는 제게 투레질을 하는 흑마에서 뛰어내려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 남자가, 전장의 광기보다도 섬뜩한 광기를 품었던 그가, 피 묻은 손을 뻗었다.
“이아나, 네가 대체 무엇인데 나는……!”
당신은 어째서…….
“레이디, 장갑을 노려보고만 있지 말고 저에게 첫 춤의 영광을 안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손을 노려보고 있던 이아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붉지 않다. 하얗다.
바보. 본인을 앞두고 누구를 떠올리는 건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아나는 아르하드가 여태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저와 춤추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첫 춤을 가져가기 위해서.”
이아나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제쳐 두고 귀족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제 첫 춤을 함께 추고 싶다는 아르하드의 마음이 싫진 않았다.
“훗.”
웃음이 나왔다. 아르하드와 춤을 추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아르하드의 돌발 행동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둘째 치고, 네 첫 춤을 가져가겠다는 그의 선포를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스스로가 현재 이곳에 있음을 깨달아 버렸으므로.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강제든 아니든 첫 춤의 상대가 바하무트 제국의 황제가 될 사내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판이다.
이아나가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나비가 꽃에 앉듯 조심스레 닿았다. 제 손에 얹어진 이아나의 손을 아르하드는 희열 찬 눈으로 보았다.
꽃이 오므라지는 것처럼 아르하드의 손가락이 접어졌다. 이아나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세게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녀를 쭉 끌었다.
귀족들이 춤을 즐기고 있는 홀의 중심에 다다라 아르하드가 이아나의 몸을 강하게 끌어당기자 바닥과 힐이 맞부딪쳐 따닥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오른손을 그녀의 왼쪽 날개 뼈 부분에 슬쩍 얹었다. 포옹을 할 때처럼 몸이 밀착했다.
이아나는 아르하드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자치고는 큰 키인 데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높이의 힐을 신었음에도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이아나가 아르하드의 팔꿈치 위쪽, 삼각근 밑쪽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밑으로 옷에 감춰져 있던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발을 밟을지도 모릅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아나는 그의 팔을 가볍게 감싸며 작게 속삭였다. 어렸을 때 교양으로 배웠던 춤이 아니라 사교계에 나와서 추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아나는 걱정은 뒤로하고 일단 춤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음껏 밟아도 좋아.”
아르하드가 너그럽게 말하자 이아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을 아르하드는 눈에 담았다.
“바보. 잘못 밟으면 발등이 파일 수도 있는데.”
이아나가 왈츠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목을 옆쪽으로 살짝 젖혔다. 앞을 보던 아르하드의 시선이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져 있는 이아나의 뇌쇄적인 목선을 흘끔 훑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턱 선을, 슬쩍 올라가 있는 붉은 입술 선을, 날렵한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듯 열기로 매만졌다.
목을 옆으로 살짝 꺾은 채 이아나의 시선이 루비가 또르르 굴러가듯 그에게 흘렀다. 음울한 집착이 맴도는 형형한 금안과 나른한 웃음기를 품은 강렬한 적안이 왈츠의 선율과 함께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