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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386g | 145*210*20mm
ISBN13 9791187433088
ISBN10 11874330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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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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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물었다. 이혼을 원하시나요? 졸혼을 원하시나요?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고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대답했다. 계약결혼만기가 되었는데 어떻게 좋게 갈라질 수 있겠는지 궁리중이라고 솔직히 말하지를 못했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라도 내가 거처할 작은 독립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비용을 남편에게 요구할 법적 권한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말만 했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남편이 사라진 날 이전까지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너와 나의 예정된 가을」중에서


“어, 밥상 올리는 것 오늘이 끝이야. 혼밥도 못 먹는 귀신도 있어. 당신이 우리 어머님 제사상 지난 16년 동안 안 차렸거든. 오늘까지 열여섯 번째 제사상이었어. 맛 있었어? 산소의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헤어지기 전에 내가 어머니 제삿날마다 올리는 제삿밥, 당신한테 원없이 해먹여 보내라고. 내일 법원 판결문 올 거야. 이젠 당신 입, 가고 싶은 데로 가.”
---「혼밥의 결말」중에서


나와 덤덤이는 서로에게 잘 길들여진 게 틀림없다.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우리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매우 단순하다. 최소한의 단어로도 소통이 가능하며 대화에 쓰이는 단어도 대부분 긍정적이다. 설령 말실수를 한다고 해도 뒤끝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아쉬운 점이라면 내게서 사회적대화의 기술이 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대화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을 점점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옆집남자의 가족사진」중에서


나의 행복은 간단하고 저렴한 만큼 극대치로 오르는 반비례의 법칙이 적용됐다. 남의 소소한 행복은 내가 견뎌낼 만한 작은 불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때문에 내가 크게 행복하기를 원치 않음도 누군가 치를 큰 불행과 함께함을 바라지 않는 까닭이겠다.
---「행복아파트」중에서


창문에 걸어놓은 포충낭이 한 개 남은 네펜데스 미란다까지 그녀가 떠나기 전 그대로다. 그녀가 늘 그랬듯이 환생한 듯 돌아오리라, 나는 믿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물건은 곧 그녀의 삶이었고, 주인을 잃은 물건들을 나는 무덤 속 부장품처럼 끌어안고 스스로 순장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이렇게 의문부호로 어정쩡하게 그녀의 떠남을 정리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위장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반주첼로 모음곡」중에서


땀의 시간을 밟고 차근차근 올라섰지만 벼랑을 디디는 순간 끝나는 인생이었다. 나를 바치고 얻은 모든 것에서 하차해야 했다. 희망을 놓칠 때 절망도 함께 놓쳤는지 누굴 원망할 기운조차 없었다.
---「하이고」중에서


-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떳떳해. 암, 그렇고말고. 내가 수행한 그 많은 일들은 사실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서 저지른 거지. 내 책임이 절대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나도 일종의 피해자야.
- 오, 불쌍한 내 영혼이여!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널 자유롭게 풀어 줄 테니까.
---「어떤 고독사」중에서


여자는 남편의 몸을 만졌던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아이의 작은 몸을 껴안던 느낌이 살아났다. 얼마만인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여자의 두 눈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달빛에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난다면 믿을까? 여자는 달빛 속에 오래 서있었다.
---「해피 버스데이」중에서


사람들은 사방팔방에 길을 뚫어놓아 자신이 만든 길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늘 선택한 길이 과거의 모든 길을 새롭게 바꾸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완전한 길이란 없었다.
---「뼈의 춤」중에서


여태 침묵을 지키던 S마저 “직진.”이라고 말했으므로, 나는 소신은 없고 성질만 조금 있는 자의 전형을 그대로 밟아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모든 곳에 출구가 있었지만, 나를 위한 출구는 없는 듯했다.
---「친구에게 가는 길」중에서


- 당신은 이미 죽어있는 것 같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예? 무슨 소리죠? 저 살아 있습니다. 보세요. 심장도 잘 뛰잖아요.
- 어휴, 그렇죠. 심장은 잘 뛰죠. 그런데 심장이 뛴다고 살아 있는 건 아니잖아요.
- 아니, 보면 알잖아요.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말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실 검사를 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 말고 또 누가 당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죽어도 아무 상관없잖아요. 직업도 없고 결혼도 못 했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살아 있는 남자」중에서


무연고자로 죽은 혼령들이 이승에도 저승에도 머물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다 아직은 하느님께 가기가 억울하다며 하나 둘 모여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비록 지상에서 가난하게 살았어도 혼자 사는데 익숙했던 그들이었지만 저승 문턱에 다다르자 이렇게 힘을 모으게 될 줄은 그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밤의 아리아」중에서


- 아이구, 내가 부끄럽네. 나는 젊어 흥청망청하다가 늙어 혼자 되고, 정 사장 자네는 젊어 혼자 이 식당에 갇혀 일벌레로 살다가 많은 이웃을 얻었구만.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판 덕일세.
---「기쁜 나의 저승길」중에서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텔레비전 안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그들 앞에 한 사람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쩔쩔매고 있었다. 아마 어떤 게임에서 져서 벌칙을 받고 있는 거 같았다. 그 외엔 모두가 즐거워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어 그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홀로 살아내기」중에서


「쓸쓸하고 고독했던 윤지당 그녀였기에 아마도 부뚜막이 그녀의 식탁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호롱불도 켜지 않았을 어둑한 부엌에서 홀로 눈물의 밥을 먹으며 아녀자의 몸으로 남성에 버금가는 수행의 학문에 정진해 나아갔으리.」
---「그녀와 그녀를 만나다」중에서


누군가에게는 보람찬 하루를 끝맺는 충만한 시간인데 그에게는 자꾸 가슴이 벌렁거리며 쪼그
라드는 슬픈 시간이었다. 담배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어느새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 부러 나뭇잎들이 금빛으로 떨고 있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황금빛 훈장들이 나무에 달려있었다. 너무도 슬픈 황금빛이라는 생각만 들었고 그래서 모든
슬픔은 노란빛일 것만 같았을 때 눈앞이 흐려졌다.
---「선셋증후군」중에서


예수가 결혼했냐. 고타마 싯다르타는 처자식을 두고도 출가하지 않았느냐. 결혼 안한 사람이 어디 그뿐이냐. 데카르트, 칸트, 니체, 보들레르, 랭보, 바이런, 플로베르, 카프카, 고갱, 다빈치, 리스트, 뉴턴……. 그러면 친구들은 K의 입을 틀어막고 이렇게 공격한다. 야, 네가 그 사람들과 같은 급수냐? 그러면 K는 또 항변한다. 야, 급수는 다르지만 적어도 독신이라는 하나의 동질성은 그들과 공유하고 있다 이 말이야. 너는 결코 그 사람들과 이런 동질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라 이거야!

결혼은 포위당한 성과 같다. 밖의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안의 사람은 밖으로 나오려 한다.
---「이상형을 찾아서」중에서


마침내 그는 손을 펴고 편히 누웠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70년은 너무 길었다. 하루하루는 너무 금방 지나갔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느낄 틈 없이 무언가가 다가오고 곧 사라졌다. 이제 그의 몸도 그리 될 것이다. 누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말소리는 멀어졌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 그의 몸을 둘러쌌다. 그는 딱 한 번 눈을 떴다가 감았다. 흐릿한 하늘만 눈에 가득 찼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까스명수」중에서


으흑. 고양이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고, 가랑비 피하려다 소낙비 만났다는 옛말, 틀린 옛
말 없다더니, 아주 맞다. 주먹 없으면 언감생심, 이빨이라도 지녀야지 이것저것 쥐뿔도 없는 놈이 산속에서 날폼 잡고 혼자 살려는 심중부터가 애당초 틀렸다는 게 속담처럼 맞다는 것이렷다, 쓰바.
---「틀린 옛말 없다더니」중에서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문득 잠을 깨보니 칠흑같이 어두운데 사방이 온통 물이다. 아
니 나마두의 눈에는 바다로 보였다. 검은 바다에서 노란리본을 단 손들이 무수히 뻗어 나와 나마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파랗게 질린 나마두는 바다를 표류하고 있는 쪽배에 간신히 올라 갑판에 몸을 말아 웅크렸다.
---「기억 저편의 낙원」중에서


너의 마음을 살피려 하지도 않고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너를 보내던 날. 너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네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치열했던 너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너와 나」중에서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어떤 상태에서 그렇게 전화를 해댔는지는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제 걱정은 말라며 딸이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며 작은 새 한 마리가 내 심장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파리발 나의 독립일」중에서


문에 녹슨 열쇠를 꽂으며 혹시 문이 열려있나 잠깐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열쇠를 돌리자 딸깍 소리와 함께 잠겼던 문이 열렸다. “여보, 나 왔어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불쑥 튀어나온 말에 정작 놀란 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가 뱉은 말은 텅 빈 거실과 빈 방들을 맴돌아 와 다시 그녀의 가슴 깊은 곳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목울대에선 뜨거운 무엇이 울컥 올라왔다. 아직도 집안 곳곳에는 남편의 온기와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녀는 남편이 토끼잠을 자곤 했던 소파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러곤 외출한 그녀를 기다리느라 남편이 서성거리던 창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홀로라는 이름」중에서


그가 졸며 온 몸으로 지휘하는 버스가 도시 곳곳을 살핀다. 가로수를 부여잡은 사람, 누구에겐가 전화를 거는 사람,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사람. 밤을 거니는 이들의 발걸음은 위태롭다. 방향성을 잃은 딛음은 마치 시체들이 걷는 듯 했다.
---「어제의 밤은 누가 돌보았나」중에서


이 긴장된 대결의 결과는 한 순간에 결정될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변수에 의해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결과에
따라 각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9회 말」중에서

결국, 나는 이일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새벽 6시 경에 눈이 떠지는 상황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마치 매일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 같은 것이 되어가는 듯 했다. 또한, 그 그리움은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마치 내 안에 남아있는 ‘나의 희망’을 찾아가는 듯 설렘이 뒤섞인 기다림이었다. 심지어는 그가 다시 오면 문을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리움… 내가 혼자 살기를 결심하고 가장 먼저 버려야만 했던 감정이었다.
---「새벽 6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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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일은 독신, 독거, 이혼, 사별 등 속의 메마른 명사로 환원하기 어렵다. 살아가는 일이 항상 동사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니픽션 이야기꾼에게 명사는 너무 짧고, 동사는 너무 길다. 형용사가 안성맞춤이다. 참신하면 더 좋고, 도발적이면 더더욱 좋은데, 그 예가 바로 이 작품집이다. 참신하고 도발적인 형용사로 우리 시대 혼자 살기의 다채로운 무늬를 포착한 작품을 연달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박병규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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