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이념형으로서의 ‘절대적 전쟁’에 ‘현실의 전쟁’이라는 개념을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전쟁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파고들면 모든 전쟁은 적의 절멸을 목적으로 해야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현실의 전쟁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논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연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은 ‘정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전쟁은 정치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리하여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투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테제가 전개된다. 전략은 목적이나 정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p.35
간접접근전략이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공격함으로써 최소한의 리스크와 비용으로 승리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전략의 목적은 적의 저항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며 또한 “적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적을 궤멸시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리고 적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그 저항을 단념시키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는 적의 최소예상선을 정하고 물리적으로는 적의 최소저항선을 정하여 전진하면 성공확률은 높아지고 비용은 낮아진다”라고 리델 하트는 말한다. 여기에는 전략이 적과 나의 의지 충돌,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적의 허를 찌른다”는 문맥에서 드러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전략이란 정책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배분하여 운용하는 기술이다”라고 하여 전략이 정치목적에 의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수단을 목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수단에 맞추는 것”을 전략원칙의 하나로 서술하여 전략의 역동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p.41
제1차에서 제5차까지의 대포위토벌전에서 마오쩌둥이 가장 중시한 것은 서전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최초 전투의 승패는 전국에,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제1원칙은 제1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지휘관이나 병사는 원래 공격하는 것을 좋아하고 피하는 것을 꺼리는 성향이 있을 것이다. ‘적극적 방위’라는 개념을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는 알지 못하고, 소극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따라다닌다. 게릴라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진정으로 이해되고 수용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서전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을 것이다.---p.108
처칠은 자신의 노력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사기를 높이려고 했다. 영국전투에서 독일공군이 도시 폭격에 중점을 두었을 때, 피해지구를 돌아보고 피해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비행장을 방문하여 조종사와 대화를 나누고, 독일군의 상륙지가 될 만한 연안부를 직접 시찰했다. 이러한 행동이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처칠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여, 이 전쟁이 악과 싸우는 정의의 전쟁임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게다가 처칠은 다가올 독일과의 공중전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또 미국의 역사가 존 루카치John Lukacs의 말을 빌면, 처칠만큼 히틀러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지도자는 없었다.---p.154
히틀러는 자기 자신의 군사적 식견과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때문에 그는 군사합리주의에 철저한 프로이센 육군의 전통을 계승한 독일국방군 장군들의 정책 제안?건의에 일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주 작전?전투단계의 공략 목표나 전력배분의 변경을 되풀이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중요한 국면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도리어 소련군에 반격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자승자박에 빠졌다.
순수 군사전문분야인 작전총사령부에 과잉개입한 히틀러와는 반대로, 스탈린은 (처음에는 자신의 군사적 직관에만 의존하여 작전?전략상의 오류를 범하긴 했지만) 1942년 여름부터 비로소 군사전문가를 신뢰하게 되어 그에게 작전의 기획입안과 실행에 대한 권한을 크게 부여했다. 이러한 점이 독일과 소련의 명암을 가른 하나의 요인이었다. 스탈린은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견지하면서 장군들의 의견에 신중히 귀를 기울이면서도, 군사작전이 달성해야만 하는 정치적 역할에 관해서는 스스로 결심하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p.201
군사합리성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정치와 군사, 중앙과 현장 사이의 본질적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무엇을 이룸으로써 생긴 실패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실패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무언가를 이루고 얻은 실패는 검증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결과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잇을 것인가? 실행하지 않은 것을 실증하기는 어렵다.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을 수행하지 않았을 때의 기회손실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리스크(당사자의 책임)를 회피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방기나 무작위로 이어지기 쉽다. 중앙과 현장, 정책주체와 실시주체 사이에는 언제나 이러한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말하자면, 작위와 무작위를 둘러싼 책임소재인 것이다.---p.239
사다트가 나세르에게 물려받은 것은 파탄 직전의 이집트 국가경제였다. 이 피폐한 국가재정을 사다트는 파산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현상인식 아래, 사다트는 위기의 원인을 1948년 이래의 수년에 걸친 대이스라엘 임전체제의 지속과 수차례에 걸친 무력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상태의 종결이야말로 경제적 파탄을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확신했다. (중략)
한편, 사다트는 ‘위대한 지도자’ 나세르의 그늘에서 정치적인 무능력과 무해성 덕에 부통령의 지위를 꿰차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시선 덕분에 사다트는 나세르에게 지워졌던 카리스마에 대한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되었다. 아랍대중으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지 않았던 사다트로서는, 아랍세계 전체의 지도자로서 ‘아랍의 대의’를 고양해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다트에게는 보다 많은 행동의 자유가 있었다.---pp.273~274
전략론은 전략의 본질론과 원칙론의 두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전자는 클라우제비츠로 대표되는데, 철학적?해석적?개념적으로 전략에 접근한다. 그는 전쟁을 ‘확대된 결투’라는 메타포로 파악하여, 이념형으로서 ‘절대적 전쟁’의 개념을 전개했다. 후자는 조미니로 대표되는데, 전략의 원칙화를 지향하여 분석적?객관적?과학적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는 전쟁의 보편타당한 기본원칙을 확립하려고 하여,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주장한 클라우제비츠의 본질론을 부정한다. 조미니의 이론은 본질론보다는 분석적 접근을 선호하는 미국의 군사이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후의 전략론은 양자의 통합을 지향하게 된다. 리델 하트나 마오쩌둥은 손자나 중국 고전의 본질적 통찰에 의해, 간접접근전략이나 게릴라전의 원리원칙을 전개했다. 현대의 전략연구가(루트워크, 하워드, 그레이 등)는 클라우제비츠의 ‘마찰’ 개념이나 변증법, 나아가서는 복잡계 등의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정태적 전략론에서 동태적 전략론의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pp.363~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