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 본대는 일자진을 형성하고 마구 달려들었다. 돛과 노를 동시에 단 평저선인 판옥선의 경우엔 방향 전환이 용이하고 진형을 갖추는 것이 쉬웠다. 그래서 원 역사에서 이순신의 연안 함대는 학익진을 구사할 수 있었다. 허나 에스파냐의 주력 함선인 겔리온은 범선으로, 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 곳을 집중 공략해야 하는 이때에도 에스파냐 함대는 일자진을 형성한 채 비효율적인 공세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양쪽 끝의 함선은 포격을 하고 싶어도 포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태였다. 확실히 안개가 짙게 깔리고 거기다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물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귀선이라 규정한 물체에 대규모 포격을 가했다. 포연까지 허공을 뒤덮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사정 봐주지 말고 계속 포격하라! 적군이 닿기 전에 완전히 침몰시켜!” 제독을 비롯한 각 함선의 장령들은 연거푸 소리를 지르고 지휘도를 내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여기에 포탄을 나르고 쏘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제독은 짠 내가 가시지 않은 바닷바람에 흰 수염을 휘날린 채 땀조차 뻘뻘 흘려가며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한참을 포격했지만 적군으로부터 답은 없었다. 이때쯤 되면 더욱 진한 연기를 흘리며 마구 포를 쏘고 좌충우돌해야 정상이었지만, 적은 어찌 된 영문인지 잠잠했다. “벌써 침몰했나?” 제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귀선을 대하는 그로선 귀선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지 못했다. 동승한 한 명국 장수가 뿌연 안개 속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그도 영 찜찜하다는 말투였다. “글쎄요……. 벌써 침몰할 리가 없는데…….” “당최 보이질 않으니!” 마침내 그 작은 선체가 전소(全燒)되었다. 그리고 연기가 걷힌 바다에는 아무것도 포착되지 않았다. 제독의 주위에 군집한 명나라 장수들은 눈을 멀뚱히 뜬 채 껌뻑거리며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가라앉은 것인가? 한데 나뭇조각만 보이고 철갑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영문인고?” 제독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감히 나를 농락하다니……. 용서치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