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가 쓴 공상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근대의 과학과 문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숭엄함에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방향성과 윤리성과 분별력을 잃은 지식의 추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과학은 어떤가?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나의 예에서 교훈을 얻으라”는 소설의 주인공 빅터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가?--- p.88
기술문명의 아이러니는 단순히 기술로 생겨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 필요해졌다거나, 그 때문에 인간이 필요 이상의 많은 것을 욕구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기술문명의 보다 큰 아이러니는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기계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인간의 육신이 무지하게 편해지면서, 인간의 정신이 점점 메말라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억은, 전통은, 그리고 신화(神話)는 과학기술이 이룩한 삶의 혁명이 가능하게 해 준 바로 그 풍요와 자유로움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메마르고 황폐해져 가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p.126
그러나, 문제는 TV나 인터넷에 의해 만들어지는 초-현실은 뿌리칠 수 없는 요구조건을 가진 전체주의적인 힘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일성과 방향성을 결한 혼돈지향의 힘이며, 무조건의 추종을 강요하는 무형의 폭력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논리 외에는 어떤 형태의 도덕과 윤리도 없고, 어떤 형태의 양심도 작동하지 않는 무윤리적 힘이다. 더욱이, 그곳에서는 자기 사랑의 정신이 곧 공동체 사랑의 정신이 되는 길목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자기 사랑의 정신은 철저하게 이기심의 충족을 위해서만 작동한다. 요약하면, 지구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통신혁명으로 세계를 초정밀-고집적체로 만들어 지배하는 이미지 전체주의의 덫에 걸려 영혼의 순수성을 잃고, 자연과의 연이 끊어진 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초-현실 속에서 집단적 광기에 빠진 채, 가짜 자아와의 사랑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p.188
베르그송의 강의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던 시인 엘리엇에게 산업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취해 살아가는 20세기 초엽의 현대인들은 들기억으로 의식이 황폐화된 황무지인들로 보였다. 그들의 기억은 마치 컴퓨터 속의 정보들처럼 기계적으로 쌓여 있는 죽은 과거들의 단속적 집합으로서, 연상과 해리를 통해 부풀어 오르지도 않았으며, 그러므로 현재적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현재라는 순간순간만이 있을 뿐, 과거의 연속체로서의 의식의 시간(duration)은 없다. 「바람 부는 밤의 광상」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인들의 삶에는 ‘미치도록 황홀한 선율’이 흐르는 시간은 없다.--- p.270
리오타르의 말을 따르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근대사의 바탕이 된 계몽주의 담론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계몽주의 담론에 대한 신뢰의 상실 - 그것이 곧 포스트모던 시대의 삶의 조건이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무엇이 참인가?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아름다움인가?’라는 물음에서 정당성을 찾지 않았고, ‘무엇이 효율과 이윤을 가져오는가?’라는 물음에서 정당성을 찾았다. 그리고 ‘합리를 통해 자유, 평등, 행복, 아름다움 등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지 않았고,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효율성을 높이고, 그것으로 재화의 생산력을 증대하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 할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p.308
푸코에 의하면, ‘억압된 앎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침묵당한 전통들, 담론들, 버려진 앎들, 신비로운 예언들, 원리주의에서 배척된 욕망들, 경험칙(經驗則)으로 모욕당한 선험적 직관들 - 무수히 많은 앎들이 계몽주의 이후 ‘이성(reason)의 반이성(unreason)에 대한 독백’ 과정에서 억압당하지 않았던가? 푸코는 이 억압된 앎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의 빛나는 얼굴’에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더지 역사가’(mole historian)를 자처했던 푸코는 만약 어떤 역사가가 인류의 삶의 진정한 자취를 알기를 원한다면, 그는 지배담론을 해체해, 변방으로 밀려난 것, 가치를 박탈당한 것, 정당성을 상실한 것,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들의 삶 속에서의 의미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347
쿤데라는 삶의 무거움을 강요하면서 개인의 개체성과 창조적 역량을 말살하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를 독창성과 진실성이 엿보이지 않는 나쁜 감상주의 예술인 ‘키치’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그리고, 쿤데라의 세대들은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아니면 그 어떤 주의나 이념이든, 전체주의적 힘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는 것이라면 모두 ‘키치’라는 쿤데라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모두 ‘키치’ - ‘싸구려 잡념’ - 가 되어 버린 수많은 주의와 이념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살아야 했다.--- p.429-430
로웰이 감당해야 했던 하나의 실존적 문제는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그 문명의 창조자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청교도의 후예로서의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 문명의 피해자가 자신이면서, 그 문명의 가해자도 바로 자신일 때, 그 깨달음에 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로웰에게 있어서 이 물음은 그의 허무주의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는 주제였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트들도 현대문명의 타락을 마주하고 절망을 느낀 허무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의 허무주의는 로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허무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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