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이 집을 사랑했다. 소파도 없이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나 담요 한 장 깔고 둘러앉아도 그들은 좋아라 했다. 냉장고가 비어가는 것 같으면 시장을 봐서 자동차에 잔뜩 싣고 와 채워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광의 집
전화 한 통 없이 불쑥 문 열고 들어와서는 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아 훌쩍훌쩍 우는 사람, 음악을 조용히 틀어놓고 바닥에 길게 누워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속상함이 위험수위까지 올라와 아무 데로라도 떠나고 싶어 이리로 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성소가 되기도 하는 이 ‘발광의 집’은 날이 갈수록 그 존재의 의미를 더해가고 있었다.
“내가 진실로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다니까!” 하고 말하는 그들의 고백 속에서 나는 차츰 내가 이 ‘발광의 집’이라는 창고에 눌러살아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발광의 집
아이의 일기장을 우연히 훔쳐보다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엄마와 나는 미국 창문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다.’
회색이 검은색에 둘러싸이면 그냥 회색 혼자 있는 것보다 명도가 밝아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 모자가 사는 어두운 회색 창고의 명도를 밝게 하기 위해 주야로 머리를 짜고 있었다. ---「부자 연습
미세먼지는 핑계다. 그냥 밖에 나가기 싫은 거다. 삶이 너무 무겁고 구차할 때 나는 나에게 휴가를 준다. 때마침 어버이날 연휴란다.
오늘은 머리, 그중에서도 나의 가엾은 두 귀에게 모처럼의 사랑을 베풀고 있다. ‘오늘부터 나흘 동안 너희도 주인 없이 훨훨 살거라.’
통유리 창문을 가득 메운 오월의 푸르름이 바람 타고 너울거린다. 올해따라 지각 개화했던 자목련 몇 송이, 가지 끝에 축 늘어져 간신히 매달려서도 마지막 알몸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내일이면 더는 볼 수 없을지 모르는 그것들…. 나는 그들을 마음 깊이 껴안는다. ---「연휴, 귀를 떼서 물 아래 내려놓고
시간이 힘겹게 지나가고 있었다. 독한 모르핀이 마침내 그녀의 말까지 빼앗아갔다. 여인은 긴 잠속에 빠졌다. 방 안에 움직이는 거라곤 숨죽인 채 원을 그리며 그녀의 죽음을 독촉하고 있는 벽시계 초침뿐이다. 여인의 무거운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나며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침대 옆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는 아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라도 빗질해주고 싶었던가, 가슴 위로 조금 올렸던 여인의 오른손이 잠시 허공에서 떨리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가만히 하늘 어딘가에 정좌했다. 그 뒤의 ‘고요함’…. 그것은 이 순간을 경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새로운 언어였다. 격한 가슴을 터뜨린 두 아들의 신음 소리는 가슴이 없어져 버린 울음이었다. ---「엄마의 일기장에서
다음 날 오후, 부음이 전해왔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승도 이승처럼 과속방지턱이 있나, 하늘길 쿨렁 휘어지며 새 한 마리 푸드덕 솟아오르다가 다시 평행선을 이루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왜 내게 왔던 것일까? 쫓기는 표범이 최후를 마치는 곳, 그곳이 킬리만자로라고 했다. 그녀는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 내게로 쫓겨 온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을 게다. ---「그녀의 킬리만자로
마치 떠오르다 빨랫줄에 걸린 풍선처럼 목이 걸려 나는 오르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행여 구조선이라도 보내주나 했던가? 야속하달 것까지는 없지만 지체 없이 사약을 내리는 친구의 말 한마디가 내 귀퉁배기를 치는 순간 뭔가 불쑥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뿔이다.
그리고 조금 후.
그 뿔에서 물발 센 분수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뜨거운 삶의 출렁임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무지개를 토하고 있었다. ---「뿔」중에서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로 그지없이 그윽하기만 했던 그 시절 나는 꿈만 먹고도 살지 않았던가. ‘나는 키스할 일이 없다. 고로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로 바뀌어버린 지금, 어쩌면 나는 애써 움켜쥐고 있던 한 줌의 긍정을 영원히 떠내 버려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홍삼 대신 립스틱을 바람막이로 집어 들었는지 모른다.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으려 불로초를 찾는다는 광고를 낸 진시황처럼 나도 광고를 내걸까? ‘아직도 홍삼 제쳐놓고 립스틱을 집는 내게 최고의 변호를 해줄 유능한 변호사를 찾습니다!’라고 써서? …
“이 글 쓴 사람 몇 살이냐고 묻고 싶거든 그 전에 립스틱 한 개를 더 사서 택배로 보내다오. 그것만이 그 고약한 ‘젊음’이란 놈에게서 추방된 내 불뚝거리는 심기를 생기로 돌변시켜줄 마력의 도구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립스틱과 홍삼」중에서
바다도 아플 수 있고 바다도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된 나는 기실 지금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죽어가는 살갗을 만지며 싸늘해져 가는 가슴을 마른 헝겊으로 닦아주고 있는 그들 속에서 나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하다가 물속으로 첨벙! 빠져버렸습니다. 바보 물고기 ‘몰라몰라’처럼 말입니다. 느닷없이 목격한 당신의 죽어감이 몸서리치게 무서워져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등지느러미를 움직여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낙지, 전복, 굴, 가리비 등을 만나면 나는 본능적으로 저쪽, 당신이 고통 받고 있는 곳을 돌아다보았습니다. 아직도 멀리 군데군데서는 당신의 은밀한 숨소리가 떨림으로 반짝이는데 기름과 눈물로 범벅이 된 당신은 스스로의 무게로 깊이깊이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중에서
사방에 노을이 지고 있다. 비둘기 두 마리가 깃을 치며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다. 나도 집을 향해 걷는다. 그냥 지나가도 괜찮을 바람이 목에 두른 앵두색 수건을 흔들어대며 제발 살아 있으라고 외쳐댄다. 그리고 이내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너희들이 온갖 것으로도 이 바람 한 점보다 더하지 못하리라.” _195쪽, 다섯 글자 안부」중에서
무대 왼쪽에서 지휘봉을 든 장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위가 잠시 죽은 듯이 조용하더니 그의 양손이 부드러우면서도 박력 있게 아래로 떨어졌다. 첼로와 비올라의 저음 유니슨 선율이 조용히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치고 지친 전선의 안갯속, 깊은 시름을 뚫고 무엇인가가 서서히 그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난 작은 새의 머리 같았다. 이윽고 피콜로의 작은 구멍에서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 즈음, ‘텅!’ 팀파니가 팽팽한 뱃가죽을 내려쳤다. 란이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1951년 달동네 달순이」중에서
이상한 세상이 아닌가. 어린 바이올린은 생각했다. 악기(樂器) 로 세상에 태어나 악 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본 적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대엔 못 올릴망정 목을 끈으로 묶어 기둥에 매달아놓다니.’ 게다가 나는 미성년자다.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이란 말이다. 어른들이 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아이들용 바이올린이란 말이다. _335쪽, 어린 바이올린 이야기」중에서
작년 봄부터인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언어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단어나 문장으로 얘기하지 않고 흐름이 전혀 없는 ‘점’으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피아노 건반 위로 고양이가 걸어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가 때로는 입만 움직이고 소리는 전혀 없는 무성영화 배우로 연기를 했다. 오른쪽 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사기그릇, 유리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고 왼쪽 귓속에서는 종일 수십 마리의 오리새끼들이 꽉 꽉 꽉 울기 시작했다. ‘오리고기요리를 너무 좋아해서인가요?’ 하고 의사에게 농을 할 때만 해도 나에겐 아직 기다릴 봄이 있었던 것 같다. 심한 난청에다 악성청각장애가 왔다고 의사는 말했다. ---「베토벤을 만나다」중에서
네 ‘좌절의 체험’을 위해 우리 축배를 들자. 그 체험이 설사 비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 비극성이 너에겐 절대로 ‘낡은 것’으로 다가올 리가 없어. 살아 있는 생생함으로 너를 일으켜 세울 터이니 걱정 마. 네 귀가 들을 수 없게 떠드는 사람들을 향해 우선 문을 닫는 작업부터 해. ‘음악’도 예외는 될 수 없어. 들으려고 애쓰지 마. 고통의 한복판, 무풍지대로 들어가는 거야. 요즘같이 이렇게 자극 없고 무의미한 세상이 글쓰기엔 얼마나 괜찮은 거니. 이 땅의 여자로, 어머니로 70년 살았으면 네 속에 얼마나 많은 영혼의 거지들이 살고 있겠어. 그들의 얘기를 듣는 데는 귀 따위는 필요 없어, 가슴만 있으면 돼. ---「베토벤을 만나다」중에서
나요? 보시다시피 피아노죠. 아무 쓸모도 없게 된―.
뭐, 제대로 된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나 같이 이렇게 낡고 여기저기 문제가 많은 물건은 진즉에 폐기처분 할 것입니다. ‘피아노’라는 중후한 이름 자체만으로도 그 향기와 특권을 누리면서 번듯한 삶을 살았을 테지 생각하시겠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내 경우, 제대로 된 피아니스트 한 번 만나보지도 못했지요. ---「한 피아노가 있었지요」중에서
오늘 하루도 아무런 변화 없이 갔지요. 저어기 보세요. 조립공 서 씨가 퇴근을 서두르고 있잖아요. 입에 줄창 물고 있던 담배꽁초, 이제야 땅에 던져 발로 끄네요. 조금 있으면 창고 문이 닫힐 거예요.
그때 귀를 기울여보세요. 무겁디무거운 철문을 온몸으로 밀어 철컥! 하고 잠글 때 보시면 창고 속 우리들은 제각각의 음 피치(pitch)에서 생기는 야릇한 울림으로 우우~ 신음하지요. 에스에프 영화 속에서 우주인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 씨는 떠나고 우리만 남습니다. 겹겹이 거미줄이 걸려 있는 저어쪽 높은 창가로 종일 먼지에 시달린 햇살마저 고개를 묻으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침묵으로 가라앉지요…. ---「한 피아노가 있었지요」중에서
만원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가슴 안주머니를 만져보았다. 가불해서 받아온 지폐가 무사한 것이 확인되자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고개를 한껏 숙여야 대문을 들어설 수 있는 야트막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엎드려 있는 동리 골목길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길고 짧은 굴뚝 그림자가 달빛에 무늬져 있었다. 서너 걸음 앞서 뒤뚱거리며 걷는 남자의 반신이 이따금씩 달빛조명을 받았다가 사라졌다. 아버지다. ---「내 안에 잠든 음표들」중에서
이제 나는 나이가 들 만큼 들었다. 나는 아무런 부담감 없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관중석에 앉아 있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인생 오케스트라 속에 어떤 악기였을까?’ 하고.
북이다. 사람들은 나를 팀파니라고 불렀다. 오케스트라에서 내 자리는 관중석에서 보면 마주 보이는 벽 쪽 맨 뒷자리, 월급 차이야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적어도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 지휘자의 눈높이와 나를 치는 팀파니스트의 높이는 같다. 외관으로 보기엔 팀파니는 언제나 비교적 높은 자리에 있다. 세상 속의 나처럼.
---「나는 북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