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네 얼굴을 보고, 네 손을 잡고,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피부와 눈과 귀로 느껴지는 감촉과 모습과 소리를 어떻게 편지 한 장으로 대신할 수 있겠어? 예전에도 편지가 너와 나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던 적이 있었지. 기억나? (……) 일곱 살이었던 네가 내게 보낸 답장은 단어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처음에는 빈 편지지처럼 보였지만 종이에 불을 쪼이니 글씨가 조금씩 나타났지. 다정한 마음씨에서 레몬 향기가 퍼져나왔어. --- p. 9~10
“비어트리스, 엄마야.” 나흘째 네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소식이었어. 어떻게 짐을 챙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막 가방을 닫으려는데 토드가 방으로 들어왔어. 그를 향해 돌아서며 내가 물었어. “비행기 예약했어?” “내일까지는 비행기에 자리가 없대.” “나는 당장 가봐야 하는데?” --- p.19
나는 너처럼 붓을 거침없이 휘둘러 순식간에 근사한 그림을 그려내는 재주는 없으니 이 이야기를 아주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그림으로 그려내려 해. 점들이 하나씩 모여 마지막에 그림 전체를 보았을 때 어떻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한 장의 점묘화가 완성되기를 바라. --- p. 20~21
네 세면도구가 놓인 선반을 보자 내 바람은 산산이 깨졌어. 더는 희망을 품을 여지가 보이지 않았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든 너는 그곳에 가려던 계획이 없었던 거야. --- p. 55
‘나야.’ 그때 너는 전화기 너머에서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어. ‘남자아이래.’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대.’ 네 목소리가 너무 여려서 나는 네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어. 낭포성 섬유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질병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 둘 앞에서는 어떤 위로도 소용없었으니까. ‘오빠가 겪었던 모든 고통을 이 아이도 똑같이 겪게 될 거래, 비.’ --- p. 66
네가 이곳에 홀로 닷새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어. 샤갈의 그림처럼 네가 네 몸을 빠져나가는 상상을 머릿속에 붙잡아두려고 해봤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었어.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란 대로 네가 네 몸을 떠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나중이었을까? 마침내 경찰이 너를 발견해 살인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너를 보았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시체 안치소에서 경찰관이 너를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내 내가 너를 보았을 때, 비로소 나의 슬픔이 너를 네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켰을까? --- p. 155
너는 정말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만큼 삶을 소중히 여겼을까? 네가 내게 전화를 걸었던 기록이 내 의문에 대한 답을 말해줬어. 고통스럽게 얻은 답이기는 했지만 그 답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다’였어. --- p. 221
엄마는 네 관 위로 흙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어. 우주에서는 폭발이 일어나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 p. 319
“대부분 사람은 과학자들이 하는 일에 열정이 담겨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속에 당연히 열정이 담겨 있으리라 기대할 테지만, 우리는 차갑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자들이니까요. 사람들은 ‘임상’이라는 단어에 서 차갑고 냉정한 느낌을 받지만 그 단어에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병상에 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선한 일에 임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과학자들은 예술가와 음악가와 시인이 그러하듯 노력과 헌신 그리고 열정을 다해 선한 일에 임해야 합니다.” --- p. 340
크롬메드 사옥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운명에 대해 생각했어. 인간의 삶이라는 실을 잣고 그 길이를 잰 뒤에 싹둑 자르는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해. 그리고 또 인간의 DNA에 대해 생각했어. 우리 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 속에 우리의 운명에 대한 코드를 담고 있는 이중나선구조에 대해. 그러고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과학이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어.
진정 놀랍다. 스타일리시한 만큼 흥미로운 이 작품은 범죄소설과 문학작품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자리를 동시에 차지했다. ― 제프리 디버
비탄과 죄책감, 자기기만을 빼어나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 [가디언]
이 작품으로 로저먼드 럽튼은 최고의 심리 스릴러 작가들만 겨룰 수 있는 링 위에 섰다. 그녀의 주먹은 승리로 들어 올려졌다. 작가는 잔혹한 결말의 원인 묘사와 인물의 성격으로 자기만의 서스펜스를 구축했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동시에 눈물을 쏟게 하는 작품이다. ― [뉴욕 타임스]
로저먼드 럽튼이 보여주는 슬픔과 가족의 죄책감에 대한 신선한 시각은 대담한 플롯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작가의 핍진한 서사는 무엇이 이 세련된 데뷔작의 명성을 유지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 [인디펜던트]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놀랍도록 완벽한 이 작품은 평생 본 스릴러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데뷔작이다. 젊은 힘과 위풍당당함을 모두 갖췄다. 충격적이리만치 훌륭하다. ― [데일리 메일]
대단히 훌륭한 데뷔작이다. 만일 평화롭고 안정적인 결말을 예상한다면 그 끝에는 속이 뒤틀리는 결말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 [라디오 타임스]
로저먼드 럽튼의 대단한 데뷔작은 첫 장부터 능수능란하고 성공적으로 독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서늘하고, 소름끼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비극이자 삶을 긍정하게 되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야기. ― 북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