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식 문명이 새롭게 재생하거나 비약할 수 있을 만한 고유한 바탕이 이젠 없는데, 소박하고 겸허하며 사실 최근까지도 무시당하고 있는 서구 영향 밖에 있는 인간 혹은 개인에게 무엇을 가르친단 말입니까? 수십여 년 전부터 사상가, 학자, 실천가 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인류학이 제기하는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현대 세계에 집중하는 여타의 사회과학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그늘 속에 있던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p.19
더 넓은 맥락에서 인류학은 ‘인간 현상’에 대한 연구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연현상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와는 다르게 인간 현상은 항상적이고 특수한 성격을 띠므로, 별개의 독립된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 한국에서는 7세기 이후 제가 지금 말하는 맥락의 인류학적 호기심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옛 사료에 따르면 문무왕의 이복형제가 있었는데,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익명으로’ 왕국의 도처를 비밀리에 돌아다닌 후에야 대신이 됩니다. 여기서 민간을 살핀다는 행위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 p.20~21
이른바 ‘원시’사회는 우리가 어떤 단계의 과거를 거쳐왔는지 조명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의 공통분모라 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양과 동양의 고도 문명이 오히려 예외성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인류학의 발전으로 더 많은 조사가 이뤄지면서, 소위 ‘반품’처럼 취급되고 주변부 지역으로 밀려나면서 소멸될 운명이라 여겨졌던 뒤처지고 소외된 사회들이 도리어 본연적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 한, 완벽한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그런 원시사회인 것입니다. --- p.29
우리가 사는 방식과 믿고 있는 가치가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류학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삶의 유형과 다른 가치 체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류학은 우리로 하여금 허영심을 자제하고, 다른 삶의 방식들을 존중할 것을 권유합니다. 놀라고 충격을 받거나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을 다른 관습과 관례를 알게 됨으로써,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겁니다. --- p.52~53
인류학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간주하는 것이 사실은 사물의 질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 문화에 고유하게 있는 제약이나 습관적 편견 등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가리개를 벗기고, 우리 사회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혐오스러운 추문으로까지 여겨지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른 사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토록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상한 일을 행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p.75~76
인간 사회는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다양한 수준과 분야에서 여러 상이한 태도를 취합니다. 경제활동 모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존재합니다. 인류학자가 연구하는 생산양식들이기도 한 열매 따기, 채집, 사냥과 수집, 원예, 농업, 장인의 수공 등등은 그만큼 다양한 유형을 대변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다고 믿지만, 사실상 이런 양식들이 연속적 단계를 거쳐, 우리가 본보기로 제안하기도 하는 가장 진보된 단 하나의 모델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 p.81
이들이 개발과 산업화에 저항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흔히 비경쟁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비난할 때 언급하는 수동성과 무심함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접촉으로 인해 생긴 외상의 결과일 뿐입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결핍이나 부족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그들 사이에 또는 그들과 세계가 맺고 있는 독창적인 관계도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뉴기니에 살던 사람들은 선교사를 통해 축구를 배웠고, 기꺼이 환호하며 그들의 놀이로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둘 중 한쪽의 승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진영의 승리와 패배가 균형을 이룰 때까지 경기를 계속 되풀이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우리처럼 승자가 나오면 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패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 때 경기를 끝냅니다. --- p.85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인종이 문화에 영향을 주는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주는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우리는 이것들이 다른 맥락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물학적 진보의 방향과 리듬이 넓은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바로 과거를 살고 현재를 사는 방식이며,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채택하는 문화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문화가 인종에 따라 달라지느냐 아니냐 하는 질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종이―인종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부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만―문화의 또 다른 기능이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p.114~115
인류학자는 이러저러한 종교 체계 혹은 사회 조직 형태에서 각각의 상대적 가치를 끌어내어 그 위에서 다시 지적인 혹은 도덕적인 판결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인류학자가 볼 때 사실상 도덕성이라는 기준은 하나의 가정으로서, 그 기준을 채택한 사회의 기능일 뿐입니다. 다른 문화와 비교하여 가치를 따지고, 판단을 부여해 도식화하는 것은 인류학자 스스로 반드시 금해야 합니다. 인류학자는 연구하는 민족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각 문화는 다른 문화에 대해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평가를 해도 상대주의의 포로가 되며, 이를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 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