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의 시선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물속에서 온몸을 배배 꼬기 시작한 안나에게 향했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안나는 물에서 나올 생각이 도통 없어 보였다. 그사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얼른 꺼내주려다가 시하는 문득 자신을 소환하면서 안나가 했던 ‘재수 없는 요구 조건’이라는 말이 떠올라 그녀가 잠수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두었다. ‘내 것’이 되는 게 재수가 없는 일이란 말이지?
‘죽을 것 같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나를 잠자코 지켜봤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의 오산이었다.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도 안나는 버티고 있었다. 도도하고 콧대 높은 아가씨는 바로 옆에 자신이 있는데도 손 한번 내밀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 악마를 상대로 공정한 계약 운운할 수 있었겠지. 결국 시하가 먼저 안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손을 잡아당기자 안나가 힘없이 수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어푸! 하아, 하아!”
아슬아슬하게 숨을 토해내는 입술은 이미 보랏빛이었다. 안 그래도 생기가 없던 뺨은 꼭 얼어버린 것처럼 창백했다. 자기 목숨보다 자존심이라니. 정말이지 이렇게나 자존심 센 인간 여자는 처음이었다. 여태껏 그가 꿈을 빼앗았던 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래야 내 것이 될 자격이 있지.”
가만히 안나를 바라보던 시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수 없는 악마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이 여자는 이미 자신의 덫에 걸렸다. 시하가 안나에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너…….”
그러곤 차갑게 언 안나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분명히 내 거, 한다고 했다?”
안나는 차갑다 못해 얼음 같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표정을 찡그렸다. 시하의 손끝에서 꽃이 피듯 그녀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부끄러워서인지, 짜증이 나서인지 알 수 없는 열기. 그 열기를 손가락 끝으로 느끼며 시하가 얄밉게 웃었다.
“너 방금, 내 여자 하기로 한 거야.”
‘내 여자.’ 시하는 일부러 ‘내 거’라는 말보다 더 자극적인 표현을 썼다. 이 말에 과연 자존심 센 아가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기가 한 말을 하지 않은 거로 만들 뻔뻔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만큼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성격. 으레 오랫동안 감금당해 있다 보면 자아를 잃고 비굴해질 법도 한데, 이 여자는 궁지에 몰릴수록 더욱 발버둥 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시하는 진심으로 안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한 번도 인간을 상대로 이런 적 없는데, 스스로가 낯설다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시하의 노골적인 시선에 망설이던 안나가 이내 결심한 듯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하면 되잖아요.”
“뭐?”
“해요. 할 거예요. 누가 안 한대요?”
“너 지금 네가 뭘 한다고 한 건지 알아?”
“네 거! 네 여자! 한다고요! 난 거짓말 안 해요!”
--- 본문 중에서
“여기, 우리가 진짜 첫 키스를 한 곳이야.”
영역 표시를 하기 위해서. 혹은 약을 먹이기 위해서. 그런 구차한 이유 없이 정말로 마음이 통해서 처음 입을 맞췄던 곳. 그래서 이곳은 시하에게 안나와 진짜 첫 키스를 한 장소였다. 시하는 그때를 떠올리듯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특별한 기억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기억이지.”
아아, 스물다섯의 오안나뿐만 아니라 스무 살의 오안나도 첫 키스는 격렬했구나. 안나는 꿈속에서 본 뜨거운 장면을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을 내뱉었다. 발뺌의 강도가 느슨해진 것이 아련한 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안나가 방심한 틈을 타 시하가 그녀를 천천히 수영장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해볼래? 이런 특별한 기억을 안 따라 하면 뭘 따라 하겠어?”
“하지만…… 그러려면 시하 씨가 물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결국 그의 계략에 넘어간 안나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시하가 씨익 웃으며 팔짱을 꼈다.
“꿈에서 본 적 없다면서 나 혼자 물에 들어간 건 어떻게 알아?”
“헙!”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안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안나, 거짓말 못 하는 건 여전하네.”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시하가 입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등 위에 쪽 입을 맞추고 뒤돌아섰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풍덩 수영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깜짝 놀란 안나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시하를 찾았다.
“시, 시하 씨? 어딨어요?”
그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느닷없이 물 밖으로 튀어 오르듯 나온 시하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푸른 달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이지러지고 있었다.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어느 순간 뺨에 물기로 촉촉해진 손끝이 닿았다.
“그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르지?”
시하는 안나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항상 날 밀어내고 거부하기 바빴는데, 그날 처음으로 날 받아들여줬어.”
물기에 미끄러지듯 내려간 그의 손은 이내 뜨거운 입술을 매만졌다.
“……좋아해. 옛날에 내가 어땠는지 하나도 생각 안 날 만큼.”
그날, 안나에게 전한 고백. 시하는 아직까지도 그때 느꼈던 떨림이 생생했다.
“만약 너도 조금이라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날 다시 불러줘. 네 곁으로.”
그땐 안나가 자신을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 받아들여줬다.
“그리고 넌 날 네 곁으로 불러주었고, 그 마음을 증명하듯이 내게 짧게 입을 맞춰주었어.”
어떻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안나가 떠난 후에도 시하는 그 순간만큼은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었다.
“난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수영장 물에 반사된 달빛 때문일까. 안나는 문득 그의 눈동자가 촉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네 핑계를 대고 입술을 훔쳤지. 이렇게…….”
부드럽게 목을 감싸고 있던 시하의 손에 단단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거, 내 탓 아니다?”
거부할 틈도 없이 고개가 기울어진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듯 이내 맞물린 입술. 꿈속에서 본 대로라면 키스하는 내내 물에 빠질 것 같다느니 어서 내려달라느니 그와 옥신각신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의 오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다면, 스물다섯의 오안나는 달랐다.
잠시 고민한 그녀가 이윽고 천천히 시하에게 손을 뻗었다. 꿈속 레퍼토리와는 다른 안나의 행동에 시하가 움찔했다. 그가 그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힘으로 넥타이를 쥐어오는 그녀의 손길에 의아한 듯 물었다.
“뭐, 뭐 해? 꿈이랑 다른…… 데?”
“알아요. 근데 지금 나한텐 기억 되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더 중요한 거? 그게, 뭔데?”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거.”
안나는 그대로 시하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더 깊게 입을 맞췄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