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사건을 확인해봤다. 내가 보호감호를 청구하지 않자 판사도 그 친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집행유예를 선고해줬다. 그는 그 길로 나가서 계속 납치 강도 행각을 벌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랜저를 훔친 것도 강도 행각을 위한 것이었다. (...) 훔친 차는 그 한 대가 아니었다. 과거의 수사 기록을 뒤져봤다. 폭행, 절도로만 생각했던 사건 내용을 자세히 보니 차를 훔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상대로 폭행을 하고 돈을 빼앗은 것이었다. 범행 수법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내 앞에서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울던 피의자는 그런 놈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소아기호증(pedophilia)이라는 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유치원생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어린아이의 치마 속에 손을 넣는다는 말인가! (...) 이윽고 수갑을 찬 채 내 앞에 나타난 피의자는 작은 체구에 얌전하게 생긴 남자였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검사님, 정말 아무도 제 말을 안 믿어주시는데요. 저는 정말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아이들만 보면 그냥 행복해져요. 학습지 판매도 그래서 시작한 겁니다. 그런 마음에서 그 아이가 너무나 예뻐서 그런 건데…… 진짜 저도 답답합니다…….”
그의 범죄 에너지는 놀라울 정도다. 한번은 하루에 두 명의 여성을 차례로 납치해서 살해한 일도 있다. 그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된 것도 범죄 충동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애틀에서 연쇄살인을 하던 번디는 유타 주에 있는 로스쿨에 다니며 그곳에서 범행을 계속한다. 그러던 중 캐럴 다론치라는 여성을 납치하려다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된다. 구금되어 재판을 받던 번디는 탈옥에 성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잡히지만 놀랍게도 다시 한 번 탈옥에 성공해서 플로리다 주로 도주한다. 1970년대의 통신과 정보망을 고려할 때 그가 플로리다에서 조용히 지냈으면 아마도 체포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학교 기숙사에 침입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을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폭행하고 살해한다. 최후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에 시달리다 못한 아내가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는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법원이 지금까지 견디기 어려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몇 건이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 건도 없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가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고 해서 바로 경찰이 출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 도둑이 들거나 폭행을 당하는 등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면 112 신고를 해서 경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럴 때는 고소장을 제출하지 않는다. 고소장을 작성해 제출하는 사건은 대개 급한 일은 아니고 내용이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최소한 수개월에 걸쳐 조사를 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만일 고소장을 제출할 때마다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를 체포한다면 사업 관계로 다툼이 벌어지거나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는 등 일상적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잡혀가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외가 하나 있다. 바로 간통 사건이다.
우리 민법은 미성년자, 한정치산자, 금치산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친권자(부모) 혹은 후견인에게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긴다. 이들이 맺은 계약은 취소할 수 있게 해서 계약에 따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제도도 두고 있다. 그런데 민법은 이렇게 보호받는 미성년자, 한정치산자, 금치산자를 ‘무능력자’라고 부른다.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홀로 서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다루는 것이다. 성년이 되었는데도 부모가 대신 나서서 자식의 일을 처리하려 하면 결국 부모 스스로 자신의 아이가 무능력자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금태섭 변호사는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재치와 예리함을 잃지 않는다. 이 책도 그를 닮았다. 여러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 편견 없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쉽게 내린 결론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간의 얼굴이 지워진 법과 정의란 얼마나 공허한지 흥미롭게 전한다. 공지영 (소설가)
살인ㆍ강간ㆍ강도 등 중범죄는 사형집행, 형량상승, 거세 등으로 근절될 수 있는가, 체벌은 학생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혼인의 충실은 형벌권을 사용하여 지켜져야 하는가, 문학과 예술의 표현에 형벌권을 통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테러범에게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첨예한 사회적 논쟁사안이다. 검사 출신 변호사인 저자는 국내외의 사례와 문학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학청년’의 기질과 소양을 가진 저자가 쓴 책이기에 술술 읽히고 흥미만점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