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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그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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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3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153*225*30mm
ISBN13 9788968176043
ISBN10 8968176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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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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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역사적 격변기에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한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함께 호흡해 본다는 것, 그의 학문적(혹은 사상적) 지향과 발 딛고 선 현실 간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 그래서 그와 그의 시대를 가급적 온전히 이해해 보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을 잘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것, 할 수 있다면 어떠한 삶의 모습이 (역사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지 제시해 보는 것. 이것이 한껏 욕심을 부리며 시작한 본고의 연구 목적이다.
梅泉 黃玹(1855~1910)은 한말의 문장가며, 시인이요, 역사가이며 한일병탄(韓日倂呑)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의사(義士)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학문)이 그의 높은 절의(節義)에 가리어 진 점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생애뿐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에 관한 이해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본고에서는 ??梅泉野錄??과 ??梧下記聞??을 주로 살핀다.


2. 국권상실기 조선의 정치사회적 배경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교적 질서의 붕괴, 정치 사회의 혼란과 삼정(三政)의 문란, 계속된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창궐, 그리고 곳곳의 민란에 더해 제국주의 세력의 압력도 날로 거세어지는 등 실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선 조선에서 주자학은 하나의 교조였다. 모든 경전에 있어 주자의 주(注)나 해석방법에 따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해석을 가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특히 송시열에게 이단이란 주희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서학(천주교)에 대처하는 체제공과 정조의 태도는 정학을 부양하면 이단은 절로 사라진다는 송시열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조선조 유학자였던 황현 역시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대원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교질서와 배치되는 이단사상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 이르면 국가가 작성한 호구조사에서 이미 유교적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구조의 붕괴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층이 그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면 이미 지배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 호적을 살펴보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양반인구가 50%를 넘어가는 것이다. 이는 양반층 내부의 심각한 계층분화가 진행되면서 몰락양반이 속출함을 의미한다. 조선조(1392~1910)의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유자(儒者), 사(士), 선비다. 이들의 사회적 신분 변동의 길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학덕의 높음으로 인한 천거가 통상의 길이었다. 그런데 세도정치로 인해 과거가 문벌과 당색에 의해 좌우되고, 과거시험 자체가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해짐에 따라 몰락하는 사족들이 속출하게 되는 것이다.
관직이 유일한 사회적 가치였던 조선사회에서 이렇듯 유학자가 관직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은 곧 경제적 몰락까지 수반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양반신분이 매매되기 시작했고 중인, 서얼, 부농층의 양반신분으로의 상향이동이 급증했다. 경제력이 있었던 부농들은 납속(納贖: 죄를 면하기 위해 돈을 바치는 것)이나 모록(冒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기록하는 것) 등을 통해 합법?비합법적 수단으로 신분상승을 성취하기도 했다.
눈여겨 볼 것은 이 봉건사회의 해체를 가능케 한 기본적 동력은 17세기 이래 나타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점이다. 19세기 중엽 진주지역에서는 15.5%의 소유자가 61.8%의 토지를 소유하는 소수 지주에 의한 토지집중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성장을 지향하는 직접생산자 농민들의 요구와 서로 모순?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19세기 조선사회를 위기로 몰고 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이에 더해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되고 탐관오리의 부패와 타락은 지방행정을 극도로 문란하게 했다. 벼슬자리가 치부의 수단이 됨에 따라 정권을 잡은 자들은 관직의 임기를 단축시켜 자주 교체함으로써 축재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관직의 불안정한 상태는 관리들에 의한 탐학행위를 더욱 조장하여 농민들의 수탈은 가중되었다. 19세기 조세수취제도는 전정, 군정, 환정이라는 삼정체제였다. 전정은 전세, 대동미, 삼수미 등을 포함한 토지에 부과되는 모든 부세를 일괄하여 거두는 전결세 수취행정이었고, 군정은 양인농민을 대상으로 한 군포징수행정이었으며, 환정은 환곡의 분배와 수취행정이었다. 조세수취방식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점차 쌀?콩 또는 면포 등의 현물 수납방식에서 화폐납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화폐납의 성행은 조세수탈을 신분제적 질서에 의존한 수탈방식에서 상품화폐관계에 편승한 수탈로 바꾸어, 수탈의 양의 증가 뿐 아니라 수탈방식에 있어 커다란 질적 변화로 이어졌다. 우유를 냄비에 넣고 끓이면 넘치듯이 삼정의 문란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정리하면, 농민에 대한 무제한적 수탈이 가능해져서 부유한 농민들은 신분상승 등의 방법을 통해 조세수탈로부터 빠져 나가고, 이들이 부담해야 할 조세는 몰락해가고 있었던 빈농층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이렇게 양반 계층 내에서도 부를 집적해가는 소수의 양반과 몰락해가는 사족이 있었던 것처럼, 농민층 내부에서도 부농과 빈농이라는 계급의 분화와 그에 따른 대립관계가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염병이 만연하고 자연재해도 빈번하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1660년부터 1884년까지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수가 십만 이상이었던 때도 6회나 될 정도였다. 19세기 조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1821년 한때 만연했다가 엄청난 피해를 남긴 채 곧 사라졌지만 1860년을 전후하여 다시 그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전염병의 창궐을 맞아 정부나 민간에서 한 일이라고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죄인을 사면하는 일 뿐이었다. 홍수와 가뭄과 기상이변, 그리고 흉년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나, 더욱 가혹한 수탈과 기우제만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이?송시열?홍직필의 뒤를 이어 조선조 성리학계의 정상에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인간의 본성은 존귀하다고 재삼 확인하고 있으나, 그들의 백성들은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조의 지배질서와 그것을 지탱해 온 주자학적 이념은 결정적으로 붕괴되어가고 있었으나 이에 대체할 만한 신념체계나 새로운 비전의 제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도처의 민란과 ??鄭鑑錄??과 같은 참위설과 최재우의 東學이 조선조 지배질서의 근간을 뒤흔들기에 이른다.
특히 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에는 2월의 진주민란을 필두로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71개 군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3월에는 익산의 농민 3천여 명의 농민들이 삼정의 시정을 요구하며 관가에 납입하여 수령을 위협하거나 원망의 대상이었던 이서들을 죽이고 그들의 가옥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안동 김씨 가문을 필두로 한 집권층은 민란을 탄압하는 한편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으나 3개월 남짓 추진되다가 백지화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정감록??은 이씨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대망하고 있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鄭眞人 혹은 진인(眞人: 메시아)은 조선 후기 민중들이 갈망하던, 고통 없는 세상을 실현시켜 줄 해방자이며 민중의 우상이었다. ??정감록??은 이씨 왕조의 멸망, 엄청난 재난에 대한 극단적인 묘사와 몸을 보존할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설명으로 불안한 민심에 영합했고, 실제로 십승지를 찾아 떠나는 인구이동을 가져오기도 했다. 조선 후기 민란에는 거의 빠짐없이 이 정감록이 등장하거나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다.
민란은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동학농민전쟁은 이 민란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 이전 최제우의 동학표교(1860년 4월)는 병을 고치는 영부와 주문 암송이라는 샤머니즘 혹은 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학사상에는 서양세력과 서학의 동양 침투 앞에서 동아시아의 중화문화권의 위기와 아울러 우리나라의 보국안민의 계책에 부심한 민족자주적 사상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최제우도 서학에 대해서는 유학자들의 척사주의와 공통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왕조가 다했다는 시운적(時運的) 혁명관(革命觀)에 따라 후천개벽의 대사회변혁을 통해 지상천국의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후천개벽사상을 주창한다.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인간평등의 새 사회를 건설하고 만인이 시천주(侍天主)의 인간 존엄의 주체가 되어 군자 공동체의 ‘지상 천국’을 건설한다는 바로 이 부분이 많은 농민들을 포섭한 주요 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학 세력은 동학당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그 가담 인원의 대부분은 전라도의 농민들이었다. 이 지역에 차별과 수탈이 자심했던 것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이렇게 19세기를 지나면서 조선 사회의 모순이 더욱 복잡하게 드러난 것은 서양세력의 위협이 현실화 된 데에도 큰 까닭이 있다. 서양의 도전 양상은 천주교의 확산, 이양선의 출몰과 개국통상의 요구로 나타났다. 이러한 격변기에 매천 황현은 1855년(철종 6년)에 태어나, 1910년 56세 되던 해 한일병탄의 비보(悲報)를 듣고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순절하고 만다.


3. 황현의 생애와 사상

매천 황현은 1855년(철종 6년) 전남 광양에서 황시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로는 세종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가 있고, 선조대에 충청병사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활약했던 황진이 있으며, 인조대에 정언을 지낸 황위가 그의 8대조다. 그러나 그 후 벼슬이 끊겨 남원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 광양으로 옮겨 산 몰락양반의 처지였다. 다행히 그의 조부가 치산(治産)에 힘써 영락한 가계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매천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조부의 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집에 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아들 매천의 입신양명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남긴 재산을 오직 손자 공부하는 데만 쓰라고 유지를 남긴 조부와 아버지의 정성에 힘입어 3천 권이나 되는 장서에 둘려 쌓여 시를 쓰고, ??매천야록?? 등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황현은 어릴 때부터 시와 학문에 재능을 보였던 듯하다. 11세 되던 해에는 왕석보(王錫輔 1816~1868)에게 나아가 율시를 배운다. 특히 그의 시는 다른 선비들의 경우보다 시구 자체가 절실하고 감칠 맛 나는 특유한 시풍을 나타내어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이렇듯 재명(才名)이 크게 알려져 호남지역에서 열리는 시험 장소에 가게 되면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많이 모였다고 한다. 17세 되던 해 순천영(順天營)에서 백일장시를 실시했을 때 영장(營將) 윤명신이 의관을 벗고 그를 맞자 매천이 영장에 대해 ‘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선비는 선비인데 그대의 무례는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따지니 영장이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권위와 이해에 타협하지 않는 그의 기질의 일단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라 여겨진다.
그는 1879년 24세 때 서울에 올라가서 당시 시단에서 이름을 떨치던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특히 이건창, 김택영과는 절친했다. 이때 이건창은 15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전국 사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황현은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이 깊어졌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매천만이 이건창을 깊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이건창도 매천을 높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현은 대과에 응시하지 못하고 생원시 합격에 그친 듯하다. 그가 29세 때인 고종 20년, 특설했던 보거과(保擧科)에 전라도에서 황현을 추천하여 예시에는 장원을 했으나 시관(試官) 한장석이 그를 시골사람이라 하여 제2등으로 하자 그만 향리로 돌아가고 만다. 선조 중기로 접어들면서 지방에 있던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하기가 어려워지고 후기에 들어서는 극도로 부패해져 갔다. 당파와 파벌정치로 인한 화와 매관매직의 상황을 매천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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