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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687g | 188*254*30mm
ISBN13 9788975989483
ISBN10 8975989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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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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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의 약사(略史)

광주는 한반도의 남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전남북지역을 총괄하는 호남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고대사회에 있어 광주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원시적인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으나 실증적인 흔적으로서는 신창동 유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청동기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마한(馬韓)을 그 상한으로 할 수 있다.
광주지역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광주지역은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도시의 북서부를 관류하여 서남으로 흐르며 동쪽에는 무등산, 북쪽에는 병풍산과 삼각산, 남쪽에는 금당산, 서쪽에는 어등산과 용전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처럼 일종의 분지를 이룬 넓은 뜰에 영산강의 지류들이 흐르고 있어 주변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광주의 지리적 위치는 한반도 서남부의 동경 127° 01'~ 126° 49', 북위 35° 04'~ 35° 16'에 위치하며 해발높이는 72.4m이다. 그러나 도심인 광주읍성지 주변이 해발고도 10m 이내의 거의 평지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도심의 북부와 동부에는 해발고도 500m 내외의 산지지형이고 남부와 서부에는 평지 및 100m 내외의 구릉지가 산재하고 있다.
광주는 산간지대와 평야의 점이지대에 해당하면서도 광주천의 퇴적에 의한 비옥한 충적지가 발달하여 유사 이래로 적합한 농경지가 되어 왔다. 또 분지형의 지형은 방어에 유리하여 군사상ㆍ행정상 좋은 위치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을 미루어 보면 극락강이 흐르는 서남쪽 일대의 평야지대가 일찍부터 인간의 생활장소로 이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는 현존하는 고인돌 등 선사시대의 고고학적 유적이 영산강 지류인 대촌천, 지석천의 인접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광주지역의 모태가 된 영산강은 담양군 용면 용연리 가마골 용추봉 남쪽에서 발원하여 극락강, 황룡강, 광주천, 지석천, 고막천 등을 지류로 삼아 목포 앞 바다로 흘러 내려간다. 영산강 유역은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선사시대부터 자연이 베풀어 준 환경에 알맞게 교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자연환경, 바다를 통한 외래문화의 교류, 다도해의 구성과 같은 해양문화를 포함한 지리적 배경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꽃피어 왔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영산강유역에서는 광주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인 산월동, 광주철도 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었으며 최근 나주 동강과 공산면 등 저평한 구릉지대인 하류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서도 광범위하게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에 이어 한반도의 청동기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시작되었다. 영산강유역의 선사문화는 청동기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인 문화형성단계에 돌입하게 되고 어느 시기보다도 이 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조사된 시대이다.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으로는 대표적으로 집자리를 들 수 있다. 영산강유역에서 조사확인 된 집자리는 광주 송암동과 영암 장천리가 있으며 집자리로 추정되는 유물 산포지는 담양 제월리 등 수십 곳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의 집자리는 신석기시대에 비해 훨씬 밀집된 분포를 보인다. 이는 인구증가에 따른 취락의 대형화를 나타낸 것이다.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되면서 주위에 방호나 방책시설을 하여 외부와의 경계를 삼았다. 이와 같은 대규모 취락의 형성배경은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체제로 바뀌면서 생활이 안정되어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이루어진 데 있었다고 본다.
청동기에 이어 나타난 서력기원 전후에서 기원후 300년경까지를 원삼국시기라고 한다. 고고학에서는 초기철기시기와 철기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영산강유역에서 발굴된 원삼국시기의 최대유적인 광주 신창동유적은 유아용 공동묘지, 토기요지, 밭, 소택지, 집자리 등 복합농경취락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목제 유물과 토기류,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목제유물은 각종 농기구, 목공구, 생활용구, 직조용구, 악기, 의기류 등 다종다양하여 우리나라 고대 민속자료 뿐 아니라 목기문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유물이다. 당시의 목제 가공기술과 목기에 대한 의존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곡식, 씨앗, 짐승과 물고기뼈, 민물어패류 등 당시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유물, 다양한 토기의 종류와 칠기 제작과정을 추정할 수 있는 칠기용기, 완전한 인골, 장신에 쓰인 유리옥 등이 출토되어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된 바 없는 유적이다. 실로 발굴역사상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 할만한 세계적인 선사유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쓈 영산강유역에서 이루어진 고대 사회의 공동체들은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통합되어 조그마한 국가단위로 이행되었으며 결국은 마한이라는 소국가적인 집단으로 발전해 갔다고 판단된다. 광주지방에 국가단위 사회가 발생한 시기는 마한시대로 추측된다. 위지동이전한조(魏誌東夷傳韓條)에 의하면 마한지역 중 광주와 관련하여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일대로 보고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의 반남ㆍ덕산ㆍ대안ㆍ신촌에 소재한 30여기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일대로 추정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ㆍ송암동ㆍ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광주가 속한 구사오단국은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한시대 각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상한년대는 지석묘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 기원전후가 되며 하한년대는 백제의 근초고왕때 마한 잔여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아 AD 4세기 후반이 된다. 따라서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4세기 후반까지 4ㆍ5백년간 지속된 것으로 본다.
한강 유역 일대를 지배하던 부족연맹체인 백제가 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형성한 것은 근초고왕(346~375)때였으나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하여 도읍을 웅진(현 공주), 사비(현 부여)으로 천도하고 나서야 확고한 행정구역제를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다. 전남지역의 군현은 중ㆍ동ㆍ남ㆍ서ㆍ북 오방의 하나인 남장 구화하성(久和下城, 장성ㆍ구례의 二說)에 속하였는데 이 무렵의 광주지역은 무진주(武珍州)이며 직할 3현인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한 거점이 된 무진주(武珍州, 광주), 발나(發羅, 나주), 월나(月奈, 영암)는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에서 무진(武珍)은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다. 광주는 남방 밑에 무진군(武珍郡)이라 대동지지는 기록하고 있으나, 여타 기록은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기록한다. 이밖에 지금의 광주지역 안에 나주 노안면 일대에 복룡현(伏龍縣)과 현 광산구 본량, 임곡 일대에 수천현(水川縣)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는 백제시대에 남방(南方)의 관할인 무진주, 복룡현, 수천현의 행정구역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진군은 뒤에 무진주로 승격되었으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16년(757)의 일이며 이때에 전국을 광주지역인 무주(武州)를 포함하여 9州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즉 통일을 이루고 난 후 677년에 무진도독이라 하여 도독으로 천훈이 파견되었으며, 757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진도독부라 하고 도독부 직할영현은 현웅현(玄雄縣)인 현 남평, 기양현(祈陽縣)인 현 창평, 용산현(龍山縣)인 현 평동, 본량, 삼도 등 3개현이었다. 당시 무주에 속한 군현은 1주 15군 43현으로 전라남도 전역에 해당된다.
광주가 무주(武州)라고 기록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경계 및 신라의 옛 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무진주조에 기록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686)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미드형의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혜공왕 12년에는 경덕왕 때에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옛날처럼 복구되어 지방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신라후기에 무주ㆍ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고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아니면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진에 도독을 두었다가 다시 총관을 두었는데 경덕왕 때에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무주(武州)로 고쳤다. 그리고 현 광주지역인 복용현은 용산현(龍山縣)으로 수천현은 여주황현(艅舟皇縣)으로 변경되었다.
무주는 근처 3현인 현웅현(玄雄縣, 남평), 용산현(나주일부), 기양현(창평)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 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시위부(侍衛府)와 9서(誓)당의 중앙군 이외에도 5주서(州誓) 및 삼변수(三邊守),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십정(十停)이 바로 지방군을 뜻하며 정(停)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십정중의 하나가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현웅현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흑색금(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미다부리정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광주는 후백제 견훤정권의 출발지였으며 견훤의 아들들이 태어난 지역이었다. 따라서 서남해안 지역이 왕건에게 쉽게 융화되고 왕건의 편으로 돌아섰을 때도 광주는 견훤의 세력지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왕위 계승문제로 갈등이 야기되어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왕건에게 복속한 이후에도 광주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의 세력지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왕건이 신검 등을 물리치고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야 광주도 고려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지금의 광주지역인 무주를 기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고 8년 후인 900년에 무주에서 전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후백제의 지역에 속하였다. 이처럼 후백제의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던 광주는 936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왕건에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23년이 지난 940년에 무주를 광주로 개칭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그러니까 이 때부터 광주라고 불렸다. 그리고 용산현이 다시 복룡현으로 바뀌고 여황현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그 후 고려 성종 14년(995)에 관제개혁이 있었는데 전국을 3경ㆍ4도호부ㆍ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靈岩)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에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ㆍ승주에서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담양)ㆍ패주(보성), 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에 다시 행정구역을 재현하여 제도(諸道)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대 도호부ㆍ8목ㆍ56지주군사ㆍ28진장ㆍ20현령을 두었다.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가 1259년에 공신인 김인준의 외향이라 하여 주로 승격, 익주(翼州)라 하였으며 뒤에 다시 광주목으로 되었다. 또 1310년에는 광주목에서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하여 무진부(茂珍府)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1373년(공민왕 23)에 다시 광주목으로 되었다.
고려말에 이르러 불교는 심한 타락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원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많은 토지를 모아갔으며 많은 농민들을 노비로 소유하였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을 궁지로 몰아넣고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하는 요인이 되어 사회적으로 큰 모순을 야기 시켰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배척되고 성리학이 국가경영의 통치이념이 됨과 아울러 백성을 교화하는 교육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광주는 1393년(태조 2)에 지금의 도와 같은 계수관(界首官)을 두게 되어 광주목은 2도호부(담양, 순천), 2군(보성, 낙안), 7현(고흥, 능성, 화순, 동복, 옥과, 진원, 창평)을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행정조직은 고려시대의 것을 따라 1413년(太宗 13)에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에 8도제가 채택되었다. 즉 중앙직할지인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수원부(水原府), 광주부(廣州府)의 4도(都)를 제외하고 전국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의 8도로 나눈 것이다. 이 8도는 고려의 5도에다가 경기도와 양계인 동북면과 서북면을 함경도와 평안도로 개칭한 것으로서 결국 고려의 5도 양계제를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전라도는 좌도ㆍ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진부, 광산현(光山縣) 등으로 불리며 강등과 승격이라는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광주목이 유지되었다. 1895년 전국이 23부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나주부 관할 광주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전라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생겼으며 관찰부를 광주에 두게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광주라는 명칭의 변천은 광주→무진→광주→광산→광주→광산→광주→광산→광주→광산→광주(군)로 바뀌었고, 5회의 강등을 거듭하면서 광주, 무진, 광산의 3개 이름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기 들어서면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행정체제로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왕조상으로 보면 한일합방 연도인 1910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왕조는 사실상 갑오경장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즉 중국식 가산국가체제가 서구식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이 시대에 마련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지방제도의 개혁은 갑오개혁 최후의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다. 내무아문(內務衙門)은 이 지방 제도 개혁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조사에 착수 지방행정 구역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사업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1895년 1월에 제정한 홍범(洪範) 14조(條)에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의 직권을 삭제한다.”는 조항에 따라 개혁이 단행되어 같은 해 5월에 “도제 폐지ㆍ지방제도개혁 및 지방관제”가 공포되어 다음달 1일부터 시행했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 발표로 광주는 면이 되고 1931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광주읍이 되었다가 1935년 광주부가 설치됨으로써 행정구역은 41정(町)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자 주둔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동안 실시되다 1947년 6월 3일부로 군정청이 폐지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광주부는 1949년 ‘광주시’라고 개칭되었고, 1973년 7월 1일 구제(區制)가 실시되었으며, 1986년 1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주민자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자치(自治)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1995년에 광주직할시를 광주광역시로 명칭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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