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
초간본에는 우주생성론에 관한 노자사상의 핵심이 들어있다. 학자들은 갑조와 을조의 죽간 작성 시기를 춘추 말이나 전국초기로 본다. 그 때가 BC480년에서 늦어도 BC450년 이전이다. 노자는 장수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초간본의 갑조와 을조를 고원본(古原本)으로 보는 것이다. 노자의 우주생성론에 관해서는 1장·2장·6장과 35장을 함께 읽어야 노자의 압축된 우주본체론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중 략]
[道란 무엇인가]
이 장에서 말하는 道는 사람이 다니면서 만들어지는 물리적인 도로(道路)라는 뜻도 아니고, 인륜을 나타내는 도리(道理)라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우주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운행하도록 하는 형이상적 태일의 영이다. 이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이 창생한 피조물이 아니다. 천지창생보다 먼저 태일과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태일과 동격인 ‘신령(神靈)’이다. 신령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지 몰라서 글자로 ‘道’라 쓰고, 별명으로 ‘大’라 불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道는 창생된 것이 아니고, 天地는 태일이 창생한 것이다. 따라서 (해석1)이 바르다. [※고전에서 비슷한 발음의 글자를 통용하였다. (예) 道dao와 大da. 德de과 得de]
道는 시간이 생겨나면서 그 속에 진입하여 현상계의 만물 속(中)에 자리하며 만물을 화육(化育)한다. 그 작용은 한없이 멀리 나가다가 극점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순환 왕복운동을 멈추지 않고 영원히 시간여행을 지속한다[35장의 “周而或始”. 통행본의 “周行而不殆”]. [중략)]
불교에서는 천망(天網)을 ‘인드라망(Indra’s net. Cosmic web)‘이라고 한다. 인도신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힘의 신인 인드라Indra가, 정의의 신인 아수라Asura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물로 제석천궁 위의 하늘을 덮었는데, 그물의 매듭에는 구슬을 달아 두었단다. 아수라 군대가 어느 한곳에 침입하면 그곳의 구슬에 모습이 비치고 이어서 다른 모든 구슬에도 비치게 되어 있는 정보망이다.
일체의 존재가 홀로 있지 않고 첩첩이 겹쳐진 가운데 얽혀 함께 존재함을 비유하여 설명할 때 이 말을 쓴다. 우주의 모든 요소는 그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매듭에 달린 구슬은 구슬마다 우주 전체를 비추어준단다. 우주 속에 한 구슬이 있고, 한 구슬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 전체 속에 하나가 있고,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는 연기론(緣起論)이다.
한 사람의 신체를 인드라망으로 보면 세포라는 그물로 얽혀 있고, 세포마다 유전자라는 구슬이 있으며, 이 유전자가 그 사람 전체를 비추어준다는 뜻이다. 우주만물도 마찬가지로 道라는 구슬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이런 우주적 관계의 망은 “너무 넓기 때문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한없이 미치고, 한없이 미치니 제자리로 되돌아간다[大曰逝, 逝曰遠, 遠曰反].”라고 했다. 우주의 역동적 순환 질서를 설파하는 말이다. 이러한 장엄한 ‘태일의 섭리’가 自然이다. [중 략]
[덕(德)이란 무엇인가]
노자철학의 핵심은 天과 人사이에 통로를 여는 일이다. 天은 인사(人事)에 귀결되는 것이고, 또한 인사의 근본은 반드시 天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天이 곧 自然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자의 세계관·사회관과 인생관은 하나의 통일 체제를 이룬다.
“노자철학의 목적은 형이상적 우주론의 건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질서의 근원인 道로부터 인생의 의미와 생활태도를 찾아 잘 정돈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의 우주론이란 노자의 인생철학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서복관(徐復觀)의 견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체로 긍정한다.
人은 만물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일반 물(物)과는 달리 만물의 영장으로서, 만물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人에게 道·天·地와 대등할 정도의 숭고한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인본주의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1장)]
道는 만물을 낳기만 하고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德과 상부상조하면서 만물이 성장하고 결실을 맺게 하고 보호해준다. 道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而然)이다. 이 점이 창조주가 피조물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으면서 생사에 직접관여하고 있다고 보는 기독교사상과 다르다. 여기에서 德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인덕(人德)이 아니라, 만물지덕(萬物之德)을 가리킨다. [곽기의 책 685~686쪽. 719쪽]
“德이란 오행(仁義禮智聖)의 다섯 가지 품성이 해화(諧和)되어 몸 밖으로 내는 아름다운 화음”이라 했다. 오행 중에서 어느 한 요소만 빠져도 아름다운 화음이 나오지 않는다. 오행의 화음을 옥음(玉音)이라 했다. 옥음이 곧 德이다. 德은 道가 있어야 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오행이 있어야 성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참조: 제30장 해설. 《대학·초간 오행》 237쪽]
[기기(?器)]
마음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만족이다.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려고 하면 넘쳐버리지만, 조금 아래 선에서 멈추면 넘치지 않는다. 사람의 욕심에는 제한 선이 없다. 남보다 조금 더 가지려고 하고, 조금 더 높게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 삶의 무대가 고해(苦海)가 된다. 그러니 보통사람들은 고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명성·재물]과 [건강·생명]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라고 질문한다면 어느 누구든지 같은 답을 할 것이다. 그런데 실재로는 명성과 재물을 더 많이 얻으려고 노력한다. 우리 사회는 “군자는 죽은 후에도 명성을 내지 못할까 고민한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논어15-20)”고 말한 공자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명성을 중요시해왔다. 명성과 재물에 대한 과욕 때문에 건강을 잃고 심지어 생명마저 잃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욕심이 어느 한계를 넘으면 이성이 마비되고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사고를 친 다음에야 후회하지만, 이미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고 재앙이 찾아온다.
공자가 노나라 환공의 사당을 방문하였을 때 ‘기기(?器)’라는 그릇을 보고 사당지기에게 무슨 그릇이냐고 묻자, 사당지기는 “환공이 자리 오른편에 두던 유좌기(宥坐器)”라고 대답한다. 공자가 “이 그릇은 비어 있으면 기울고, 알맞게 차면 바르게 놓이며, 가득 차면 엎어진다[虛則?, 中則正, 滿則覆]”고 들었다면서 제자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여 그릇에 담아 실험해보니 실제로 그와 같았다. *《순자(荀子)》[유좌(宥坐)편]
고대 중국에서 왕이 앉는 자리의 오른쪽에 놓고 보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알맞게’ 처신하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데 사용한 그릇이다. 이를 ‘계영배(戒盈杯)’라고도 한다. 공자도 이를 항상 곁에 두고 마음을 추스르며 과욕을 경계했다고 한다.
[성인(聖人)]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물의 왕이 되는 까닭은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하면서, 색깔이나 성분이 혼탁하든 특정한 곳에서 흘러왔든 차별 없이 모든 물을 포용하여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강물은 먼저 가려고 앞을 다투지도 않고 밤낮으로 더불어 흘러간다. 어느 강물이든 흘러가는 방향은 바다일 뿐이다. 바다는 수많은 갈등이 녹아들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배타적이거나 개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래서 자유가 넘쳐나는 공동체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갇혀 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하여 겨레의 자존(自尊) 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156쪽]
성인은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는 강을 닮고, 가장 낮은 곳에서 모두를 포용하는 바다를 닮았다. 서로 다른 중생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여 하나의 화음을 내게 하고[화이부동(和而不同)], 또 타자를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움직인다. 천지와 소통하면서 만물의 화육(化育)에 참여하고, 민중을 교화하여 善의 경지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역사상 여러 성인이 나타나 인간사회를 좀 더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왔다. [중 략]
성인은 지위가 비록 민중의 앞에 있고[在民前] 또 민중의 위에 있지만[在民上], 언제나 겸손하고[以身後之] 말씨도 공손하다[以言下之]. 성인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대할 때도 언제나 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며 말한다.
[섭생(攝生)]
‘罪’자가 죽간에는 ‘辛(신)’자 위에 ‘自(자)’자가 있는 모양이다. ‘皇(황)’자와 비슷한 모양이라고 하여, 진시황이 ‘罪’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罪(죄) ? 咎(구) ? 禍(화)]에 상응되게 [甚欲(심욕) ? 欲得(욕득) ? 不知足(부지족)]을 차례로 쓴 것으로 보아, 나에게 닥친 불행의 정도에 따라 심한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의 순으로 쓴 듯하다. 그 정도가 가장 심한 것을 [罪·甚欲], 중간 정도를 [咎·欲得], 가장 약한 것을 [禍·不知足]이라 한 것이다. ‘甚欲(심욕)’은 욕심이 아주 심한한 것이고, ‘欲得(욕득)’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정도가 약한 욕심이며, ‘不知足(부지족)’은 ‘欲得’보다 낮은 수준의 욕심을 뜻하는 말이다. ‘甚欲’을 ‘淫欲(음욕)’ 또는 ‘貪欲(탐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중략]
불행은 욕심 때문에 생긴다. 욕심이 심하면 심할수록 불행의 정도도 커지기 마련이다. 역으로 욕심을 줄이면 줄일수록 불행의 정도도 작아지고, 매사에 만족함을 알면 마침내 위태로움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호랑이 발톱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모든 사물에 들어있는 발톱의 무서움은 잘 모른다. 욕심의 발톱, 물과 불의 발톱, 음식 속에 들어있는 독성의 발톱, 질병의 발톱, 법망의 발톱 등등 수많은 발톱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발톱에서 멀리 벗어나 ‘무사지(无死地죽음의 자리가 없음)’에서 살아가는 것을 섭생(攝生)이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욕심을 줄이고 무사지로 들어가 섭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불행을 온전하게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여름철의 감옥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 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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