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죽지 않는다.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노래하고, 엄혹한 일제의 싸늘한 후쿠오카 형무소 감옥에서 죽어 갔지만, 윤동주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가 다 잊었지만, 기억이 나는 인간이 하나 있다손 치더라도 악명惡名으로 남아 있을 뿐, 처참히 죽임을 당했던 예수는 의연히 살아 있듯이, 윤동주도 세상 사람의 마음속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감격적이고도 드라마틱한 텍스트이다. 그의 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애송되고 연구되어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지만, 작품은 작품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 읽히기를 기다리는 텍스트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시는 읽혀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 누구에겐가 백 번 천 번 읽힐 때나 천 명 만 명에게서 한 번씩 읽힐 때나 윤동주의 시는 살아 있는 텍스트로서 늘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가변적인 언어적 실체로 존재한다. 소월시 연구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그 연구가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 출판되고, 거듭 연구되는 것은 ‘작품’이란 늘 새로운 읽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다층적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를 관류하는 정서적 특성은 죄의식罪意識이다. 주로 부끄러움이라는 말로 표현된 그의 죄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인가.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상황과 성찰적 인식에서 온 것일 터이다. 참담한 민족의 운명 앞에서 시 쓰는 일로 저항하며 독립의지를 실천하였던 윤동주는 자기 세대의 직접적 책임이 아니었지만, 역사적 수난사의 교훈을 수없이 망각하고, 임진왜란 이후 다시 왜족倭族으로부터 침략당한 선대先代의 과오에 대해, 슬픈 왕조의 후예로서 계통적 죄의식을 가진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논하면서, 나르시스의 신화를 끌어오되 ‘관음증적 엿보기’(마광수)로 해석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거나 오독誤讀이다. 인간은 거울의식의 반성적 회로를 통해 선악과 진위와 미추를 인지하게 된 것이다. 도덕적 가치, 죄의식의 자각은 그 바탕 위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인간 의식의 거울인 언어를 가지고 불우한 시대의 시를 쓴 윤동주는 성찰을 통한 부끄러움의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자학적 정조情調를 드러냄으로써 일제에 항거하고, 불의에 도전하였다. 거듭 말하거니와 목청 높은 구호나 직접적 참여가 아니라, 스스로 파괴의 징후가 되고 작두날 위에 선 시정신의 준엄한 기준이 됨으로써 일제의 그릇된 지배논리와 폭압적 통치에 저항한 것이다.
-윤동주는, 어느 친일 시인이 막강한 일제가 그렇게 일찍 망할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듯이, 당시로서는 실로 가당찮은 일제와 맞서겠다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선택하였다. 윤동주 시인 한 사람의 힘으로 조선이 독립되고 되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엄혹한 일제 군국주의에 맞선 그 정신이 고귀하고 장대한 것이다. 훼절과 변절의 길을 걸은 허다한 예술인과 지식인들을 생각할 때, 그 곧고 아름다운 영혼은 겨레의 자긍심이 아닐 수 없다.
-땅에 떨어져 죽은 별인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사람, 그는 시적 자아인 윤동주 자신의 투영이다.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홀로’라는 시어와 함께 고독한 운명의 길을 가는 모습의 비극적 인식을 극대화한다. 참담한 참회의 시를 써야 했던 그가 암흑의 식민지 시대를 홀로 걸어가는 자아의 비장한 결의를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이 비극적 인식의 결의는 결국 일본 유학 중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죽어간 모습을 떠올려 준다.
-윤동주 시의 ‘순이’는 누구일까? 실제로 사귀고 연모한 사람일까, 아니면 가상의 모델일까? “방학 때면 외지에서 돌아온 같은 또래의 유학생들이 모여 화제의 꽃을 피웠고, 친척 여학생들이 글을 배운다는 구실로 그의 주위에 모이곤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을 뿐” 윤동주는 고향에서는 여성을 전혀 사귄 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윤동주가 당대의 세상을 환자 투성이 병원으로 진단한 데에는 이상李箱의 영향이 있었던 듯하다. 윤일주 교수가 작성한 윤동주의 연보에 따르면, 윤동주가 신문에 난 이상의 시를 스크랩하였고, 이상의 시에 대해 충격적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만큼 이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윤동주의 산문시「투르게네프의 언덕」을 보면 이상의 연작시「오감도 시 제1호」의 진술방식이 응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밤비가 내리는 시각 화자는 2층집 2층 하숙방의 등불을 밝히고 시를 쓴다. 그는 그가 거처하고 있는 다다미 여섯 장의 육첩방은 우주 공간의 방 한 칸이면서, 적국이요 식민 지배국인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임을 분명히 단정한다. 이 첫 연 두 개의 행은 그 문맥의 전후를 잘 이해할 수는 있어도 문맥상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문구를 해석하는 일은 윤동주의 시정신과 시사상을 이해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유가사상이나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서 흔히 거론됨직한 표현적 진실이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는가라는 것이다.
-윤동주는, 일제하의 공포스러운 암흑적 시대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전설처럼 고착되었고, 조국의 비극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친일 족속과 모던걸 모던 뽀이 등속들이 밤의 향락에 빠져든 실상을 자신의 사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대적 암흑을 상징하는 ‘밤’은 오로지 ‘나의 도전의 호적好適이면 그만’이라는 단호한 저항의 결의를 드러낸다.
-윤동주는 외유내강의 내성적 성격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터널이 상징하는 일제 강점하의 막막한 암흑시대에 수많은 번민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미래와 광복의 신념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잔혹한 억압 아래 짧은 일생을 도덕적 양심과 자학적 가책으로 일관하며 시詩와 정의와 민족의 독립에 투신한 윤동주 시인, 그의 갈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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