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탯줄을 목에 감고 태변이 나와 있는 상태로 처음엔 울지 않았다. 이후 아이가 고개를 제대로 가누는 것을 볼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고 혼자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살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아이를 내 품에 안게 되었다. 고 작은 생명이 나에게 주는 그 무한한 행복감이란! 마치 온 우주를 내 품안에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꼼지락거리며 하품하는 아기의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이 아이를 내가 정말 낳은 걸까? 내가 이 작은 생명의 엄마가 되다니!’
-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만 너를 만나면서 엄마가 세상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게 되었단다. 그 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소아적인 생각만 가득 했었는데……. 너를 안고, 너를 업고, 너의 손을 잡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게 되었지. 그리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도 되었구나. 그러고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고머니 안타까울 뿐이란다. 한편으로는 ‘아이구, 내 자식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내가……’ 하면서 부끄러움과 좌절감도 함께 느낀단다.
- 국회의원 나경원, ‘나의 보석, 넌 할 수 있어’
그 조그만 생명이 나에게 열어 보여준 세계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신천지였다.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내 몸이 왜 생겨났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의 무한한 돌봄을 기다리는 아기를 보며, 대가 없는 희생과 사랑을 경험했다. … ‘팔 길이 사랑’이란 말이 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을 향한 일종의 경구로, 교육학자들이 “팔 길이만큼 떼어놓고 길러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팔 길이 사랑’이란 품 안에 가두지 않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휘청거릴 땐 손을 뻗쳐 잡아줄 수 있는 거리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결코 먼 데 있지 않은 부모의 사랑과, 숨 쉬고 활개 칠 공간을 함께 누린다. … 그래, 딸아. 네 인생이 따로 있다고? 가르쳐 주기도 전에 스스로 깨닫다니, 과연 내 딸 답구나. 그래도 이 어미는 죽을 때까지 팔 길이 사랑을 계속하련다. 팔 길이만큼 ‘떼어놓는’ 사랑이 아니라, 최소한 팔 길이를 ‘유지하는’ 사랑을. 일 년에 한두 번은 활짝 펴져서 요긴하게 쓰이는 병풍처럼, 늘 그렇게 엄마는 네 인생의 팔 닿는 곳에 접혀 있으마.
- 이화여대 박성희 교수, ‘팔 길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