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인간은 왜 그다지도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 걸까? 프롬은 스스로 국가나 교회 혹은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복종을 통해 자신이 경배하는 힘의 일부가 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강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 힘이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해줌으로써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느끼며, 또한 그 힘이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이 권위가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며, 설사 죄를 짓는다 해도 이에 대한 벌은 단지 자신이 전지전능한 그 힘에게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때로 자유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가?」--- p.27∼28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과 관련, 2018년 1월 11일 국회의장실?SBS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72.2퍼센트가 ‘단일팀을 무리해서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 핵심 지지층인 20~30대가 가장 크게 반발했다. 19~29세 응답자 중 82.2퍼센트, 30~39세 응답자 중 82.6퍼센트가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3~4명이나마 한국 선수의 출전을 가로막는 단일팀 구성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시민은 “남북 단일팀은 소수의 인권을 희생해 대의를 이루겠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도 했다. 「왜 2030세대는 남북 단일팀 구성에 반대했는가?」--- p.61∼62
한국은 미국 못지않게 능력주의를 예찬해온 나라인데,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압축 성장의 동력은 바로 능력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슬로건이 전 국민의 가훈으로 받아들여진 가운데 능력이 오직 학력?학벌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평가되면서 전 국민이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 오지 않았던가. 한국의 발전이 과연 그런 교육열 덕분이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긴 하지만,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이 발전에 친화적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p.106∼107
구조적 폭력은 간접성, 비가시성, 극적 효과 부재, 비의도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사람에게서 분노를 자아내기 어려운데, 이 ‘잔혹 동시’ 사건이야말로 그걸 잘 입증해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한 동시를 쓸 수 있느냐”며 펄펄 뛰었지만, ‘학원가기 싫은 날’에 그 아이가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구조적 폭력엔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구조적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 사회의 인권 수준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이젠 우리 사회의 서열 문화를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를 외치며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적 투쟁이 무조건 나쁘기만 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도성장이 끝난 오늘날엔 한국인 대다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재앙이 되고 있다. 「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은 ‘잔혹 동시’를 썼을까?」--- p.132∼133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비교는 행복으로 가는 길에 숨어 있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행복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단지 비교에 높은 비중을 둠으로써 잘못된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겉으로 드러난 분명한 사실, 즉 쉽게 알 수 있고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의 특징에 큰 비중을 두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런 비교가 어려운 잠재적 요인은 소홀히 함으로써 스스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이, 행복한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를 덜 하고, 내적 기준에 따라 만족감을 얻는다. 「왜 한국인은 ‘비교 중독증’을 앓게 되었는가?」--- p.174∼175
다문화주의는 늘 차별 문제를 수반하고 이것이 이념 문제로 비화됨으로써 어느 나라에서건 뜨거운 사회적 갈등의 온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에선 오래전부터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뜨거운 ‘문화 전쟁(Culture War)’이 전개되었는데,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공격수였다. 그는 서구 문화는 다문화주의로 인해 내부의 집단들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내전과 분열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 세계적으로 치열한 ‘문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가?」--- p.203
당연히 정치의 형식과 내용도 달라져야만 한다. 벡은 “좌파들은 이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귀족이 되고 있다”고 했는데, 당연히 위험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는 기존의 좌우(左右)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런 새로운 정치는 “규칙들을 이행하고 상세화하는 정치뿐만 아니라 규칙들을 바꾸는 정치를 의미하며, 정치가들의 정치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치”를 말한다. 즉, 사회운동을 위한 비영리?비정부 조직의 활성화,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시민 참여 조직의 활성화,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자치 조직의 결성 등과 같은 새로운 정치의 재발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인가?」--- p.238∼239
정보의 비대칭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명 관광지, 기차 역전, 버스 터미널 앞의 음식점이 맛이 없는 이유도 바로 정보의 비대칭 때문이다(물론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일 뿐 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라는 걸 분명해 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런 음식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곳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음식점에 관한 정보가 없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좋은 식당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모른 채 그저 바로 눈앞의 음식점을 찾게 된다. 물론 값은 비싼 대신 맛은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음식점 입장에서도 손님의 대부분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라 그들을 계속 오게끔 만들어야 할 동기가 약한 편이다. 「왜 유명 관광지나 버스 터미널 앞의 음식점은 맛이 없을까?」--- p.278
글로컬리제이션의 슬로건은 “사고와 전략은 글로벌하게, 행동과 운영은 로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글로컬라이제이션’, ‘글로컬화’, ‘세방화(世方化)’, ‘지구지역화’로 부르기도 하는 글로컬리제이션은 오늘날 주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의 생존 전략으로 설정되고 있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디즈니 등이 글로컬리제이션을 잘하는 기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디즈니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어린이들에게 디즈니 캐릭터는 지역적 인물이어야 하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들은 모두 지역 언어로 말한다.……‘전 지구적으로 사고하되,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즈니의 전략이다.” 「왜 미국에서 파는 떡볶이에는 고추장 대신 간장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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