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한 장의 으스스한 그림으로 하여,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어지는 ‘서양’ 역사의 계승과 전환이 응축된 현장에 문득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여행 길에 무심코 들른 미술관이나 성당에서,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길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한 장의 그림, 한 덩어리 조각상이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시작이었다. [캄뷰세스의재판] 중에서 p.14
이상한 그림이다. 휘갈긴 듯한 독특한 터치. 부인의 눈동자 같은 데는 물감덩어리를 이겨 발랐을 뿐 아닌가. 그런데도 그 눈길은 아련한 두려움과 슬픔을 담고 있어, 무언가 긴 이야기를 걸어온다.
어째서 이렇듯 강렬한데도 이렇듯 고요한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수띤 특유의 일그러진 포름을, 그의 미칠 듯이 날뛰는 격정에서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그의 눈에 하나 가득 고여 있는 눈물 탓인지도 모른다. [데셰앙스]중에서 p.38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그리스도가 두 손의 손가락들을 오른편 옆구리의 상처 속에 집어넣어 그것을 확 열어보이고 있다.한껏 넓혀진 상처는 깊은 구멍이 되어 눈을 돌리려 해도 시선을 잡아 끌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송구스러운 노릇이나, 나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잔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차라리 외설에 가깝다. 지금 새삼스럽게 당시의 수첩을 뒤적여보니 흐트러진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다.
“회개하라, 하는 것인가…”
(…) 그러니까 나는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이래도냐 하고 들이대면서, 거짓말 같으면 이 상처를 손으로 찔러봐라, 하는 강요를 당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실제로 그것은 손가락을 두세 개쯤 넣어보고 싶어지는 검고 깊은 구멍이다.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중에서 p.110/119
--- p.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고뿔도 고약한 놈에 걸려 한여름내 기침을 해댔다.
누이하고 단둘만 남게 돼버린 집에서 할 일 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한느 중에
8월도 다 가고 내가 사는 교또에서는 지장분도 끝나갈 무렵, 우렵여행이나 하고 올까하는 생각이 뜸금없이 솟구치더니 나를 쑤셔대는 것이었다.
15년 쯤 전에 한국에 다녀온 것밖에 해외라곤 나간 일이 없었다.
부모를 잇따라 잃고 허탈해진 누이에게 기분전환 한번 시켜주자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그게 주되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 긴분전환이라기에는
마음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 pp. 5
그림들을 대하는 그의 정신은 치열하고 그의 눈은 더없이 예리하다. 인간을 억압한 당대의 사상,이데올로기,제도,그리고 그 저항으로서의 그림의 의미를 읽어가는 동안 우리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 p.평론중에서
그래, 여기서는 조선이란 무엇보다도 분단국가로서 알려져 있을 테지, 어느 민족의 분단이 그 민족을 식별하는 지표가 되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게다가 나는 방금, 분단된 자기 민족의 어느 한쪽 나라에 자기가 소속한다는 뜻을. 이국의 관헌 앞에서 승인한 것이다. 이 승강장 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저편에 기다리고 있는 기차를 타겠다는, 단지 그것뿐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면, 본시 이곳에 살고 있는 바스끄인들 자신부터가 자기네 땅의 이쪽 저쪽을 왕래하는 데 일일이 두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변을 오가는 바스끄인 누군가를 붙들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당신네 나라는 스페인인가 프랑스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쁘라도 미술관에서 지겹게 스페인의 독기를 쐰 뒤에 바스끄 땅에 서 있는 내가 무척 과민해져 있는 탓이리라.
--- p.95
그는 또 한 형과 함께 투옥되어, 이 시점까지 12년을 살았건만 석방될 희망이 없었다. 도대체 예술감상 같은 것과는 멀찌기 격리되어 있었다. 반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빈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을 떠날 때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미켈란젤로의 [노예]를 보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치부해두고 있었다. 형을 대신하여, 이 눈으로 그것을 확실히 보아둘 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명분 없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내 스스로에 대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