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나 미미한 한학 전통이 공주에는 살아있었다. 공주향교 유림회관에서 병주 이종락선생님께《논어》를 배운 첫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아, 율곡 선생이 저렇게 강의를 하셨겠구나!’
초등학교에 오니 한자 공부가 완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동아시아 한문·유교·불교·문명권’의 자손인 것이 분명하구나. 한자로 이름과 지명, 근대 이후 일본식 한자어를 국한문혼용으로 쓰는 한자 공부는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의 잔재일 수 있다. 정통 한문 공부법을 되살려야 한다. 한시를 읊고, 한문 경전을 소리 내어 읽는 성독(聲讀)을 복원해야 한다. 한문을 공부해 중세 동아시아 문명의 정수를 이어받아야 한다.
한시 ‘狂童(광동)’을 우리 말 동시로 재창조했다. 시인은 조선 시대 학자 정만화(鄭萬和)이다. 제목을 ‘말썽꾸러기’로 했다.
어느 집에 말썽꾸러기가
살았는데요.
나이가 이제 겨우
열한 살이래요.
사람 됨됨이가 우뚝
시원시원하게 좋아서요.
보는 사람마다 앞으로
큰 사람 되겠대요.
狂童(광동)이라
鄭萬和(정만화)라
一家有狂童(일가유광동)하니
年將十一歲(연장십일세)를
然獨八字好(연독팔자호)하여
人皆曰爲相(인개왈위상)을
11살 만화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을 골목골목, 들판과 산천을 누비는 것으로 공부를 삼았다. 스스로 말썽꾸러기라 하며 밝고 시원하고 구김살 없는 시를 읊었다. 어릴 때 쓴 시가 예언이 되어, 뒷날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흉년에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백성을 살려, 아름다운 이름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는 이 시를 자투리 시간에 동시와 한시를 읊고 또 읊었다.
---------------------------------------------------------------
「문조물(問造物)」에서 ‘물(物)이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변한다’고 하며 기(氣)가 그 자체로 운동하며 이(理)는 기의 원리일 따름이라고 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했다. 이규보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이 중국에서 수용되기 전에 사상 전환의 지표를 스스로 마련했다. 장차 김시습, 서경덕, 임성주, 홍대용, 박지원, 최한기가 수행할 과업에 미리 들어서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이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욱 뚜렷한 흐름을 이루게 하는 연원을 마련했다.
이규보는 창작 의욕이 아주 왕성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제대로 전해지는 행운까지 얻어《 동국이상국집》에는 다양한 형태의 시문이 문학의 이론과 창작, 공식적인 글과 자기표현의 글, 시대의 움직임과 내면의 정서를 모두 풍부하게 보여준다. 기발한 착상과 정교한 표현, 붓을 달리면서 쓰는 쌍운주필(雙韻走筆)의 재주, 격식과 규범을 떨쳐버리고 현실의 경험을 생동하게 살리는 남다른 열정, 할 말이 많아 넘쳐흐르는 소재, 모두가 범상치 않다.
길게 쓴 시가 특기할 만하다. 중국에서는 두보(杜甫)가 지은 1,785자 「공작동남비」를 최장편으로 치는데, 고려의 이규보는 「차운오동각세문정고완제학사삼백운」 3,020자를 써서 한국 한시가 중국의 것보다 더욱 장편을 이루는 특징이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규보의 시는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을 담아 산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커다랗게 모으는 두 방향이 두드러진다. 한 방향은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표현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모순을 파헤쳐 ‘농민시’를 이룩한 것이다. ( 《한국문학통사》2, 조동일, 지식산업사, 27-33, 요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