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20대 초반이던 우리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낳은 부조리 철학인 실존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 해, 사회는 아직 질서를 찾지 못한 채 가난의 누더기를 쓰고 있었고, 우리 여섯 가족은 단칸 셋방에서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 나는 생존 자체를 회의했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라 죽음의 유혹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느냐’ 하는 끊임없는 질문을 소설 습작을 통해 되풀이하던 시절, 뭉크의 그림 한 장이야말로 전쟁 통의 폭격과 기아에서 겨우 살아남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삶의 공포에 짓눌려 절규하지만 그 외침은 메아리로 돌아오고, 냉혹한 현실의 파고를 넘어야 할 책임은 각자의 어깨에 메여 있었다.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았고, 나는 1960년 그해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신문 배달을 했다. 「절규」를 통해 곤핍한 우리 가족 외에도 삶에 짓눌려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외침을 내지르는 이웃이 주위에 널렸다는 사실에 적잖은 위안을 받기도 했다. ---「뭉크의 「절규」」중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이 그림이 보여주듯 ‘지극히 인간적인 시대’였다. 오늘의 자본제적 물질문명이 막 선보이기 시작했으나, 거리에는 자동차보다 마차가 더 흔했고 모든 생산품은 아직도 수공업에 의지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음악(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이 유행을 탔고, 상징주의와 자연주의 문학(말라르메, 아폴리네르, 졸라, 플로베르 등)이 미술과 음악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발전해나갔다. 그 시대야말로 파리가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고, 모든 예술가들은 입신양명하기 위해 파리로 모여들었다. ‘예술의 꽃’이 찬연히 피었던 이 시대를 끝으로 어떤 의미에서 ‘근대의 정신’은 저물어갔고, 순수예술은 난해한 길로 접어들었다. 인상주의 그림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도, 21세기가 인간적인 정에 메말라 너무 삭막하다 보니 ‘순수한 자연의 모습과 인간적인 사람의 표정’을 희구하는 현대인의 그리움 탓인지도 모른다.
「물랭 드 라 갈레트」야말로 그 경향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우리나라의 시골 오일장에 가보면 만날 수 있는 정다운 옛 우리네 서민들 표정처럼, 이 그림의 면면에서 한 세기 전 파리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중에서
「친구의 초상」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이상의 얼굴과 빼다 박은 듯 닮은, 사실적인 초상화가 아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파이프를 문 「친구의 초상」은 보면 볼수록 희대의 문재文才 이상의 삶과 문학의 내면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체 화면은 암청색으로 어둡고, 굵은 선으로 처리한 거친 톤이 포비슴적 화풍을 강하게 풍긴다. 기존 질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약간 삐딱한 제스처, 결핵형 체질의 좁은 어깨, 노숙자 같은 더부룩한 머리칼, 선병질적인 길쭉한 얼굴에 뾰족한 턱, 가장자리를 붉게 칠한 찢어진 큰 눈에서 번득이는 굶주린 열정과 광기, 가꾸지 않은 수염 자국이 방랑아 같은 자유인의 체취를 풍긴다. 각혈을 상징하듯 붉게 칠해진 입술에 파이프를 한쪽으로 물고 있는데, 피어오르는 연기를 불꽃의 잔해처럼 분홍색으로 처리하여 활화산으로 타는 이상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상의 천진함과 오만함을 함축한 난해한 작품과 자유분방한 객기를 유감없이 증거한, 가장 이상다운 초상화라 아니할 수 없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중에서
세잔은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를 밝은 색감으로 정치하게 표현하는 인상파 화풍에서 출발했지만, 만년에 이르러 그의 관찰력은 자연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연이 인간의 마음에 닿는 심리적 해석을 화면에 독창적으로 구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 대륙이 태곳적부터 그곳에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함으로써 세계사에 편입되었듯, 자연과 사물은 세잔에 의해 가시적 해석을 넘어 재해석되었다. 풍경을 이중 구조로 추상화시킨 생트빅투아르산에 대한 발견이야말로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열어젖혔다. “모든 자연은 원통?구?원추형으로 환원된다”라는 자신의 선언대로, 세잔은 자연을 가시적이고 평면적인 넓이보다 사물의 해체를 통한 깊이의 심층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 사막이 석유의 무진장한 보고임을 처음 발견한 개발 탐사 팀처럼, 미술의 새로운 광맥을 찾아낸 셈이다.
전시장을 나서자, 영하의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의 줄이 연이어져 있었다. 세잔의 위대함을 엉뚱하게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사과를 모티프로 한 완벽한 구도의 아름다운 정물화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통해 위대한 발견을 이루어낸 세잔의 고통스러운 집념, 초월적 영감, 자기 세계에 안주하지 않는 부단한 도전적 열정에 숙연해졌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중에서
“삶이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지만, 살아온 생을 돌아볼 때 우울과 슬픔의 긴 여로를 거쳐 올 동안 때때로 즐거웠던 한 시절 한순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다 고희를 맞은 노인에게 생애 가장 기뻤던 적을 묻자, 첫 직장에 첫 출근하던 날, 첫아이를 보았을 때, 그 아이를 성례시키던 날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봄날의 낮 꿈 같은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힘든 삶을 견뎌낸다. 그림 속의 소년도 세월이 흘러 성년이 된 뒤 객지로 나와 살다, 몸이 편찮다는 고향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나 힘없는 전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느 해 달빛이 좋던 여름밤 어머니와 바닷가에서 추었던 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어머니는 가족의 튼튼한 울타리로서 창무처럼 튼튼했고 젊음의 활기로 넘쳤다. ---「호머의 「여름밤」」중에서
「시립구호소」는 웅크린 채 잠든 두 자식과 함께 시름에 차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이다. 얼굴을 마주 대한 어머니와 자식의 절절한 표정을 보라. 고단한 잠에 빠진 앙증맞은 모습의 어린 딸과 엄마 품을 파고든 젖먹이, 그 자식들을 어떻게 굶기지 않고 살려낼까 근심하다 잠시 잠에 빠진 어머니의 광대뼈 불거진 초췌한 얼굴은 더 살아갈 기력을 잃어버린 절망적인 한순간이다.
“피란 내려와 얼마나 살기 힘들었던지 너거들과 비상이라도 먹고 죽을라꼬 앙심을 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젖먹이 어린것이(막내아우) 이틀 동안 피죽도 몬 묵어 울 힘도 없이 늘어져 누웠을 때, 증말 저 자슥과 함께 죽자꼬 어판장에 나온 복쟁이(복)를 한참이나 들이다봤니라. 돈만 있었다모 그놈을 사와서 우리 식구가 끓이 묵었을 끼다……” 「시립구호소」를 보면, 언젠가 어머니가 울먹이며 들려주던 말이 귓가를 울린다. ---「콜비츠의 「시립구호소」」중에서
「임종을 맞은 카미유」에는 젊은 날의 동반자로서 고락을 함께해온 아내를 잃은 모네의 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안개 같은 검푸른색 속에 감싸인 채, 죽음의 순간을 맞는 카미유의 얼굴이 애처롭다. 그가 젊은 날부터 탐구했던 빛의 분광, 그 현란한 색채의 아름다움마저 아내의 죽음 앞에선 숨을 죽였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엷은 잔광이 카미유의 얼굴 윤곽을 살려내고, 그 주위로 마치 그녀가 당하고 있는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듯 검푸른 색을 비질하듯 거칠게 표현했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비통한 순간에도, 모네는 직업적으로 죽음 주위에 머물며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보았다. 뒷날 벌판의 노적가리와 루앙의 대성당과 영국 국회의사당의 연작 속에 아침?낮?저녁, 기후 조건에 따라 대상(사물)이 변하는 빛의 분광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내의 죽음을 보는 순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을 곧 잃게 된다는, 자신의 내면에서도 점차 빛이 꺼져가는 절망을, 그러한 자신의 심리적 변화까지 화가는 본능적으로 추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