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원인은 무엇이며, 광기는 언제 드러나는 걸까? 비극이 극적인 사고와 배경,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비극적 결함이 모여 이야기가 진행되듯 광기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극적인 사고에 해당하는 촉발 계기, 배경이 되는 장기간의 스트레스, 비극적 결함인 유전적 소인이 결합하면 광기가 드러난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에 걸친 스트레스와 유전적 소인이 있었고 계기가 될 만한 일도 겪었다.
--- p.10~11
내 정신! 내가 산산조각 냈어! 머릿속이 텅 비었다. 불이 나고, 홍수가 몰아치고, 폭탄이 터지고, 쓰나미가 닥친 후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관문으로 가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다. 이런 적이 없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소용없었다. 비명은 애원으로 바뀌었다. 제발 멈춰 주세요. 서재를 기어다니며 바닥을 치고 울부짖은 일이 선명히 기억난다. 정신을 잃고 있어. 미쳐 가고 있어. 제정신이 아니야. 이후 열두 시간 동안 나는 정신 착란 상태에 빠졌다. 낄낄대며 웃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고, 감정이 솟구치다 추락했다. 몇 분 사이에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짜릿한 황홀감에 젖었다가도 극심한 고통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바로 이날이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광란의 수요일Wednesday, 프랑스어로 메크레디mercredi, 메르쿠리우스를 만난 날이었다.
--- p.19~20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조울증을 겪는 사람’을 구분하는 조울증만의 특성이 있다면, 그 특성은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과는 별개가 아닐까? 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만, 그 증상은 개인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다르게 발현된다. 그렇다면 조울증을 단순히 개인의 정신세계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여러 형태로 발현되는 예술처럼 조울증도 소통을 원하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조울증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자아의 경계를 뛰어넘어 외부와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 p.44~45
그렇다면 과연 조울증은 질병일까? 질병은 신체나 정신의 기능을 손상하지만, 조증이 시작되면 오히려 평소보다 활발히 제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누구도 ‘질병’을 원치 않지만, 그런 면에서 조울증을 꼭 질병이라고 볼 수 없다. 내가 약을 먹으며 늘 제정신으로 피아노 정중앙의 ‘도’만 쳤다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상황을 겪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조울증을 겪는 이들도 대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영국 배우이자 코미디언 스티븐 프라이는 다큐멘터리 [조울증의 비밀The Secret Life of the Manic Depressive]에서 다른 출연자들에게 기회가 있다면 조울증을 없애겠냐는 질문을 던졌고,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그러지 않겠다고 답했다.
--- p.45
조울증은 산처럼 인간을 은밀하게 유혹해 위태롭게 하지만, 적절한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다. 조울증을 단순히 질환으로만 여기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조울증을 의학적인 관점에서만 다루는 태도는 광활한 은유의 세계에 마음을 내던지는 조울증의 진가를 간과하는 것이다. (…) 조울증을 기분이 들뜨고 가라앉는 상태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조울증은 더 깊은 세계 안에서 음악을 듣고, 예술을 바라보고 시를 읽는 모든 행위를 변화시킨다. 나는 그 정신세계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조울증을 살피고자 한다.
--- p.55
조울증에 걸린 이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20배 이상 높다. 미국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앤드루 솔로몬Andrew Solomon은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에서 젊은 여성의 자살 원인이 조울증이라고 밝혔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에 따르면 조울증을 앓는 사람 중 절반은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다. 조울증 삽화의 여러 형태에서 자살을 시도할 수 있지만, 특히 죽음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우울증과 과도하게 흥분한 상태가 혼재할 때 자살할 확률이 높다.
--- p.105
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어렵지만 참된 질문이 있다. 이 광기는 무엇을 원하는가? 바로 언어이다. 내 경우에는 시였다. 하지만 조울증은 모든 종류의 단어와 말, 몸짓과 섹스의 언어, 음악과 사랑의 언어를 갈구한다. 나는 기분이 위험할 정도로 들뜨는 순간을 알아챘다. 단어의 어원이 아닌 하나의 단어로서 인도유럽어를 ‘배우려는’ 욕구가 강해질 때였다(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거나, 거창한 계획을 세운 적 없는가?). 나는 언어의 시초(아르케arkhe)와 진리(에히트echt), 근원과 본질, 가장 구체적이고 섬세하며 명확한 단어를 찾아 헤맸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단어, 무수히 많은 언어를 이어주고 단어에 내재한 깊은 의미를 보여주는 단어를 말이다.
--- p.146~147
내 정신은 위험한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내면으로 더 침잠하자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강렬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감정이 없는 새로운 옥타브가 보였다. 옥타브의 강렬함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신을 향해 외치며 그 이상의 무언가에 닿고자 하는 모습은 같은 듯하다. 나는 광기를 무릅쓰고 시를 쓰는 게 아니라 광기로 인해 시를 쓰게 되었고, 신비한 인간의 마음속에 신화 같은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p.166
길 끝에 서 있던 친구는 내게 걸어와 가장 단순하면서도 따뜻한 몸짓으로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침몰하는 배를 끄는 예인선처럼 눈길을 헤치며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 그들은 내가 쉴 새 없이 말하는 것을 들어주었고 내가 말하기 싫어해도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 지혜롭고 따뜻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195~196
나는 잘 다녀 오세요라는 직원의 말에 울음이 터졌다. 너무나 외로웠고 갑자기 모든 것이 끔찍해졌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교회로 가서 기도했다. 신을 믿지 않았기에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을 되찾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아픈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가는 길목에 놓아 달라고 친구가 건넨 조약돌 하나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으며 회복할 수 있게 되길 빌면서 내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 p.215~216
고통스러운 순례를 끝내자 내 영혼은 스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버거웠던 마음의 짐을 매일 조금씩 덜어 내며 배낭을 가볍게 했다. 어느 날 모든 짐을 내려놓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며 햇살 속으로 떠올랐고, 나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되었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