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내부의 수니파와 시아파 전쟁이 시작되고 뒤늦게 현실을 인식한 미국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감행한 도박’이 성공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는 상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으며, 자살공격을 비롯한 민간인 공격을 감행하고, 상대의 종교 시설을 파괴했다. 이라크 인접 국가들은 각자 자신과 같은 종파 집단을 지원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를 받는 수니파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가 이라크의 운명을 놓고 대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방향감각을 상실했으며, 군사력은 낭비되고 정책은 표류했다.
2001년 4월 1일에 남중국해의 공해 상공인 하이난 섬 남동쪽 약 100킬로미터 부근에서 미국 전자전 정찰기 EP-3가 정찰 도중 이를 감시하기 위해 출동한 중국 전투기 J-8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가 사망했으며, 미국 정찰기는 하이난 섬에 불시착했다. 승무원 24명은 중국 당국에 억류되었고, 정찰기 기체는 중국 정부가 ‘불법 입국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압류했다. ……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사람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이러한 사건이 축적되면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같은 대립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 하지만 2001년 9월 11일 아침, 그러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2003년 5월, 부시 행정부는 득의의 절정에 있었다. 오랫동안 추진했던 이라크 정권 교체를 단행했고, 139명이 전사하고 548명이 부상하는 비교적 경미한 인명 피해만 입은 채 침공은 성공했다. 후세인은 사라졌고, 그의 동상이 파괴되었으며, 미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 부시는 ‘임무 완수’를 선언하면서, 승리자로서의 행복을 만끽했다. 하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약탈당했고, 이 과정에서 이라크 국가 행정에 필수적인 데이터가 사라졌다. 주민과 인구에 관한 데이터가 사라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인명부를 만들 수 없었고, 선거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려는 구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라크에서는 미군 점령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결국 2004년 3월 31일,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다. 침공을 위해 2003년 3월 동원되었던 병력은 1년의 배치 기한을 마치고 이라크 전역에서 교대했고, 팔루자에서도 82공수사단이 철수하고 제1해병사단이 점령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3월 31일에는 미국의 군사기능대행회사인 블랙워터의 직원 4명이 팔루자 중심가에서 살해당하고 시체가 훼손되었다. 팔루자 주둔군 사령관인 매티스는 이 문제를 그 사안에 국한해서 처리하려고 했으나, 시체 훼손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부시 대통령은 팔루자 전체에 대해 해병대가 전면 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매티스는 전면 공격이 적절하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현장 지휘관의 이러한 항의는 고려되지 않았고, 결국 공격이 선언되었다. 며칠간의 준비를 마치고 4월 5일에 미군은 공격을 시도했다.
2003년 4월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한 가운데 이라크조사단이 구성되었고, 이들은 이라크에서 활동하면서 후세인 정권이 추진했던 대량살상무기 제조와 관련된 증거를 수집했다. 2003년 10월에 중간 보고서가 공개되었고, 이후 추가 조사를 거쳐 2004년 9월에 최종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후세인은 핵무기를 비롯한 생물학 또는 화학무기 개발을 1990년대 초반에 포기했다. 다만 유엔사찰단을 수용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대외적 입지가 약화될 수 있어 사찰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잘못된 정보에 기초해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했고, 존재하지 않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던 것이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는 상황에서, 이라크에서 발생한 포로 학대와 고문은 미국의 전쟁 명분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이 게릴라 전쟁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이라크인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 사항이었으나, 아부그레이브 사건은 미국 점령 당국은 물론 이라크 정부에 대한 이라크인의 지지를 약화하는, 그리고 이라크 저항 세력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효과는 CBS에서 보도가 나온 직후에 이미 인식되었다. CBS 보도를 보지 못한 제1해병사단 지휘관 매티스는 텔레비전 앞에 모인 병사 중 한 명에게 어떤 뉴스가 나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병사는 “장군님, 웬 미친놈들 때문에 이번 전쟁은 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아부그레이브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었다.
2006년 2월 22일에 알아스카리 사원이 폭파되면서 이라크 전쟁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목숨을 건 종파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시아파 정부가 통제하는 이라크 경찰이 시아파 민병대의 공격을 저지하지 않고 방조하거나 거기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여, 수니파 주민이 생존을 위해서 저항 세력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특히 알카에다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전쟁은 시아파와 수니파가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종파 내전으로 변질되었고, 미군은 병력 피해를 줄이는 것 외에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도시 외곽에 만들어진 대규모 전진기지로 집결했다. 이라크가 파멸을 향해 가는 동안 미군은 철수와 이라크 전쟁의 이라크화 정책을 고수했다. 이제 이라크에서 안정적인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바그다드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전쟁터로 변화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 이후 최초의 패전 또는 패전 가능성에 직면했다.
2009년부터 이라크 전쟁은 민주당의 오바마가 마무리하게 되었다. 선거 이전부터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이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축소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가 체결한 주둔군지위협정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상세한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미국은 2009년 6월에 이라크 도시지역에서, 그리고 2010년 8월에 이라크 전역에서 미군 전투 병력을 철수했고, 2011년 12월까지는 남은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하겠다고 공언했다. 철수 계획에는 “상황에 따라 집행한다”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라크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이라크가 지불한 사회적 비용과 잠재력 상실은 끔찍할 정도다. 10만여 명이 죽고 이라크 중산층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사라졌으며, 무엇보다 종파 내전을 경험하면서 이라크는 스스로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필요한 신뢰와 국가적 정체성이 파괴되었으며, 그 대신 종파적 대립과 갈등, 불신이 남았다. 더욱이 종파적 정체성이 강화된 상황에서 미국의 증파 전략은 부족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앞으로도 이라크 전쟁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명 피해와 각종 비용, 그리고 중동 지역에 부시 행정부가 남긴 수많은 상처는 미국의 이미지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그것은 또 다른 여러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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