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개종한 사람의 신앙, 곧 나의 신앙이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나는 무신론자와의 대화를 호교론 교본의 논거들을 가지고 치르는 결투로 인식했다. 이제는 그 당시 쟁취했던 수사적 승리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런 대화에서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분리시킨 것 속에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풍요로운 시선이라 여길 만한 것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에게서 어떤 거룩한 것을 찾아내고, 그것이 그에게 그처럼 가치 있는 이유를 납득하려 했다. 나는 신앙의 반대가 꼭 무신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상숭배, 즉 상대적 가치의 절대화임을 이해했다. “무신론”이 유신론, 그러니까 특정한 신 이해에 대한 비판이라면 무신론은 신앙인에게 유용할 수 있다. 신과 관련한 모든 인간적 개념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 달 자체는 아님을 무신론이 일깨우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아닙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
--- pp. 25-26
우리는 인간으로서 늘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삶에게, 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우리도 인간으로서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무신론자에게 의문시될 수 있다.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물음을 던지는 것은 밭고랑을 파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신앙을 의문시할 수 있으면 영혼의 밭에 고랑을 팔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랑에서 새싹이 날 수 있다. 그때는 우리 신앙이 새로 꽃필 수 있다. 우리 신앙은 딱딱한 길바닥에 그대로 있지 않는다. 신앙의 흙이 갈수록 부드럽게 부서져 더 많은 열매가 맺힌다. 질문은 우리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무엇일까? 신은 무엇, 또는 누구일까? 그런 질문을 철저히 좇다 보면 나는 결국 신비 앞에 이른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일까?”라고 물을 때, 온갖 피상적인 답변에서 벗어나서 날로 더 깊이 내 영혼의 바닥으로 곧장 나아갈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 답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의 진정한 자기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가 열릴 것이다.
--- pp. 116-117
모든 인간에게는 침묵의 내적 공간에 대한 예감이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공간을 그 자체(autos)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곳을 인간의 내적 성소로 이해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이 성소의 표상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소에, 즉 우리 영혼 바닥에 있는 성전에 들어갔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자들은 이 장소를 표상으로 말하는데, 가령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내면의 독방”, 요하네스 타울러는 “영혼의 바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섬광”(scintilla animae),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집의 가장 안쪽”(intimum domus meae), 아빌라의 데레사는 “영혼 성의 가장 안쪽 방”,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하느님의 자리”로 묘사했다. 이곳은 내 안에서 하느님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내 안에 머무는 신으로서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나에게서, 또한 내 사고에서 벗어나고 때로는 체험에서도 벗어나는 불가해한 신비로 남는다.
--- p. 162
제자들은 호수에서 저 멀리 나아가고 있는데, 예수가 물결 위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만약 베드로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베드로가 아닐 것이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그는 거만한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오너라!”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간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그의 결심은 이내 불안에 자리를 내준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슬슬 들더니 자신의 두려움에 빠져 버리기 시작한다. 테르툴리아누스부터 키르케고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실존에는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물 위를 걷는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을 걱정하는 일을 그만둘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소리친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손을 내민다. “다시 한번 해 보십시오!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했습니까?”
--- p.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