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비교할 만한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해안 절벽이나 그리스의 지중해 해안선을 보지 못했고, 론강을 따라 내려가거나 도버해협의 절벽 위에 서 보지 못했으며, 로마의 베드로성당을 가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서방의 책을 읽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그들의 옷을 입지만 시골뜨기에 불과했다. 우리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과장했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 위해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억눌렀다.--- p.93
신학 공부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목사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목사가 되는 것은 너무 세속적으로 여겨졌다. 나는 신학을 오히려 철학의 한 분야라고 보았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단지 추측과 암시로만 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검증하고 세계에서의 나와 나의 위치에 관해 더 경험해보고 싶었다. 특히 당시 지배적이던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논거들을 얻고자 했다. 나는 강단에 서서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소명을 받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이고 정치적 이유로 신학과를 선택했다. 신학과는 국가와 당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독립적 사고가 가능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p.123
그러나 ‘사회주의 내에 있는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주의적 교회라는 말 자체에 모순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는 필요할 경우 사회주의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교회를 뜻하는가? 아니면 동독공산당의 강령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를 뜻하는가? 아니면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을 특별히 고려하면서 인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의 삶이라는 윤리적 전망을 목표로 하는 교회를 뜻하는가? 공식적인 표현에 대한 지방교회 간 의견이 분분해 이 논의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p.167
아들 크리스티안은 뤼소에 있는 학교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경험한 최초의 대결을 나에게 보고했다. 선생님은 순진한 1학년짜리에게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당당하게 “하나님은 어디나 계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러면 내 오토바이의 기름통에도 계시냐?” 하고 비웃듯이 되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로 선생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만일 그가 그렇게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그의 대화 상대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이처럼 값싼 방식으로 신앙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p.187
1991년 12월에 통과된 국가안전부 문서에 관한 법률은 오늘날까지도 핵심 내용에서는 여전히 유효한데, 우리는 사실상 이 법을 통해 여러 사안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 법의 전문에 따르면, 문서관리청의 임무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문서를 검열할 수 있게 하고, 불법적으로 박해받은 사람의 재활을 지원하고, 공적 직무나 사적 영역의 해명을 가능케 하고, 국가안전부의 구조와 활동 방식에 대해 공중에게 알리는 것, 즉 정치적·법적·역사적 청산을 수행하는 것이다.--- p.291
권력구조가 동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2월 4~5일 동독 여러 도시에서 국가안전부 건물이 점거되기 시작해 1월 15일 베를린 리히텐베르크가에 있는 국가안전부 본부를 끝으로 모든 국가안전부가 접수된 것이었다. 흔히 말하듯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p.298
이처럼 피치 못할 처지였던 사람도 많으므로 국가안전부의 비공식 협력자를 모두 범죄자로 보기는 힘들다. 국가안전부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쥐고 이들에게 직장에서의 퇴출, 창피 주기, 옥살이의 위협 등을 가했다. 그중에는 다른 사람을 고발함으로써 처벌을 면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 역시 범죄자에 해당했다.--- p.307
독일에서는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화해로 나가는 데 대해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동독의 국가안전부와 그 기관에 협조한 사람들에게 죄를 묻는 것은 정의를 향해 필요한 발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희생자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불타는 복수심을 부추기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희생자가 직접 복수하려고 나선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일이다. 우리는 희생자들에게 그가 겪었던 고통을 표현할 권리를 주지만 그들은 이마저도 마지못해 하곤 한다. 나는 가끔 문서를 공개함으로써 알게 된 사실이 범죄자를 용서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아는 것만을 용서할 수 있다.”--- p.342
나는 지난 20년 동안 내 삶의 주제에 충실했다. 나는 대중의 의식 속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늘 동분서주했다. 내 직업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여행하는 민주주의의 교사이다”라고 대답했다.--- p.347
대부분의 사람은 학교가 지향하는 정치적 노선을 내면화하면서 저항정신을 상실했다. 따라서 그들이 당원이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당원이 되어야만 승진이나 승급을 할 수 있었으며, 어디서나 지도적인 지위는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공산당원이 아니고서는 학교의 교장도 될 수 없었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신념이 없거나 정치적 선전을 믿지 않더라도 공산당에 적응해야 했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적응했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 안에서 최소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외적으로는 언제나 그렇게 살았다. 이처럼 국가기구에 의해 강요된 객관적 무력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관적 무력감이 되었고, 결국 이러한 조건하에 행동 의지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p.354
우리는 단 1분이라도 동독 시절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이러한 과거의 강력한 열망이 상실된 데 대한 슬픔이 가끔 우리를 엄습해오기도 한다. 싸워서 자유를 쟁취했고 그 선물로 받은 특별한 삶을 지금 와서는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특별한 삶을 위해 부자유에 반대하면서 살았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을 맞자 우리는 새로운 자유에 대해 깊은 감사와 기쁨을 가지는 한편 가끔 슬퍼지기도 했다. 나는 혁명의 폭풍우에 휩싸였던 ‘가을 같은 봄’에서 수많은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고 소화했다. 이 때문에 익숙했던 과거의 삶과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나를 너무 빨리 새로운 것에 넘겨주고 새로운 일을 향해 출발했다. 꿈꾸어온 자유가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갈망으로서의 자유는 매혹적인 힘과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로서의 자유는 행복뿐 아니라 문제도 동반했다.--- p.355
아무런 장애도 없는 관계는 자유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다음과 같은 자유의 두 얼굴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자유의 첫째 얼굴은 우리에게 신뢰를 일깨워 자기실현, 형성 가능성, 미래 등을 약속한다. 이는 인간 사이의 접촉과 만남에서도 도덕적 행태의 기본 요소인 감정 이입과 책임성을 성장시킨다. 자유의 둘째 얼굴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왜냐하면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노골적 계산,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비윤리적 과학기술 연구와 발전 등으로 결국 사람의 이기주의를 키우며 다른 사람과의 연대나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은 결국 우리 안에서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p.360
독일연방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자유로운 사회의 일상생활에서는 자유의 위대함이 일부 상실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유가 상실된 동독의 역사와 삶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자유를 소유하며 산 서독 사람보다 더 분명히 깨달은 것은, 자유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변혁을 위한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가 찬란함을 잃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우리가 원치 않던 짐이 부과될 수도 있다. 나라 전체가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한다. 우리는 자유를 갈구했고, 자유는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의 길이 열려 있고 우리가 자유 안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 자유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자유는 나에게 언제나 등불이다.--- p.361
많은 시민들이 나를 신뢰한 이유는 고착화된 정치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나를 현 정치체제에서의 대안적 후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독일의 민주주의가 불완전하지만 배울 가치가 있다고 변호해왔기 때문이다. 정당 없는 다수결은 사태를 끝없이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정당민주주의도 지지했다. 따라서 나는 정당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당을 폐기하거나 정치가들을 싸잡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이로 인해 동정심을 잃을까 두렵지는 않았다. 이는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내가 특정한 계산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수호와 개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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