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족은 씨족의 결합체이다. 그러므로 민족사 연구는 씨족 연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곧 한 씨족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씨족사는 한 민족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자기의 선조에 대한 연구는 곧 우리의 민족혼을 되찾는 데 필요불가결의 일이라고 믿는다. ---p.4
영월공 이후 우리 양씨의 현조顯祖는 대제학공이고, 씨족의 터전을 다진 분은 이씨할머니다. 대제학공은 문과 급제한 후 국자감학유, 고부군수, 양광도안렴사, 추밀원지신사, 집현전대제학 등을 역임했음은 물론 시문에 능하여 시 4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할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朝鮮詩選』에도 공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씨할머니는 직제학공이 돌아가신 뒤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개성으로부터 유복자를 안고 남하하여 후손들의 영원한 터전을 마련하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분이다. ---p.30
남원양씨 가첩家牒은 이씨할머니께서 지니고 오신 과보科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의 씨족사는 직계만의 단선으로 이어진 고려시대가 한 획을 긋고, 직제학공의 유복자이신 함평공에 이어 외아드님 판관공이 형제를 두심으로써 비로소 방계가 나타난다. 이어 자손이 번성하면서 지파로 갈린 조선 전기의 17세 ‘사士’자 항렬까지가 제2기, 그리고 인구가 불어나면서 번창하기 시작한 그 이후의 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남원양씨가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가문의 명예를 높여왔다면, 조선 후기의 씨족사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하고 역동적인 전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p.58
13世② 집의공執義公 (휘) 자유子由 (자) 희철希轍 (호) 귀은龜隱, 1444(세종 26)~1495(연산군 1) 한림공파 1465년(세조 11)에 나이 스물둘 약관으로 진사가 되고, 3년 후인 스물 다섯 살 때 식년시에 올랐다. 조선조에 이르러 남원양씨로서는 첫 등과다. 처음 관직은 예문관 검열檢閱(흔히 한림翰林으로 불림.)로 사필史筆을 잡았다. (중략) 성종의 나이가 차서 친정親政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이때 한명회는 영의정이었고, 집의공은 사헌부지평이었다. 한명회는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대비에게 대리청정을 거두지 말라고 주청했다. 실권을 넘겨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도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죄가 심히 엄중합니다. 벌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재상에서 파면해야 옳습니다.” 공은 직격탄을 날렸다. ---p.70~72
17世④ 어은공漁隱公 (휘) 사형士衡 (자) 계평季平 (호) 어은漁隱·영하暎霞, 1547(명종 2)~1599(선조 32) 어은공파 어은공은 1579년(선조 12), 서른세 살 때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생원시에 오르고, 9년 뒤인 1588년(선조 21) 식년방 문과에 급제했다. 그로부터 벼슬길에 들어가 군자감직장으로 봉직하던 중, 1590년(선조 23) 배위 삭녕최씨(1548~1590)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2년 뒤, 왜군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온 나라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온 왜군이 침략 보름 만에 한양으로 진격, 동대문을 통해 입성했다. 선조는 허겁지겁 도성을 빠져 나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도 미증유의 국난 앞에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어은공은 이런 전라감사를 서면으로 질책하고, 호남 유림들에게 격문을 띄우는 한편, 남원의 이대윤李大胤·최상중, 삼종제 모정공 희적과 함께 담양으로 달려가 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군을 조직했다. ---p.94
쌍매당공 일곱째 아드님 장사랑 시경時敬의 배위는 광산이씨 부제학 동암東巖 이발李潑의 따님이다. 이발은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당시 위관이었던 송강 정철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일가가 도륙된 비운의 인물이다. ‘정여립의 난’은 을해당론 이래 경쟁관계에 있던 서인들의 주도로 수많은 인물들이 제거된 조선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었고, 그 중심에 정여립과 형제처럼 지낸 동인의 선두 주자 이발은 서인들의 중요한 표적이었다. 광산이씨는 이발 선생의 따님이었으나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신 탓에 다행히 화를 면했다. 광산이씨 족보에는 ‘사위인 승지 시경의 상소로 동암 이발이 신원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류다. 장사랑공이 벼슬길에 나아갈 만한 정치적 환경이 아니었다. ---p.136
백수공白水公 (휘) 응수應秀 (자) 계달季達 (호) 백수白水, 1700(숙종 26)~1767(영조 43) ‘백수’는 스승이 내려준 아호다. 공은 승의랑공 처기의 셋째로, 적성면 서림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는 강화최씨 최림崔林의 따님이자 장령 최시망崔時望의 5세손이다. 태몽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벼이삭 다섯 개 중에서 가장 굵은 것을 주고 갔기 때문에 이름에 ‘수秀’자를 넣었다는 일화가 있다. 공은 어린 시절에 ‘자질이 총명하고 용모가 수려했다. 세 살 때에 눈빛이 반짝거려 보는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일곱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 여덟 살에 문리를 터득했다. 아홉 살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집상執喪이 ‘어른과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열세 살에 권집權에게 배웠고, 서른세 살 때 용인 한천寒泉으로 이재를 찾아가 10여 년 동안 사제의 의誼를 맺고 정진하여 심오한 학문의 세계를 이뤘다. ---p.174
백수공 (휘) 응수의 학문은 기호학파畿湖學派 줄기다. 이이 → 김장생 → 송시열 → 김창협 → 이재 → 양응수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다. 서인의 주류인 셈이다. 숙종 무렵에 송시열과 그 문하인 윤증이 소위 회니사생론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이래, 백수공은 노론과 어울렸다. 백수공이 당인으로 처신하지는 않았지만 노론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p.228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흩어진 군인들이 의병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이에 따라 1907년에서 1909년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은 가장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다. 이 시기의 일본군을 타격한 전투횟수는 무려 약 2천 7백회, 의병만 해도 약 14만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 항일의병 투쟁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으나, 특히 전라도가 다른 지역보다 전투 횟수나 항일 의병들 수가 압도적일 만큼 저항이 격렬했다. 이 의거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분으로는 남원양씨 춘계공春溪公 (휘) 춘영春泳을 비롯한 몇 분이 손꼽힌다. 춘계공은 1875년(고종 12), 구림면 국화리에서 절충장군 석민錫民의 큰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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