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 도구인 형광등을 활용해 빛으로 생성된 새로운 공간의 환영을 일구었다. 1963년부터 그는 벽면에 단독으로 2.4미터 형광등을 설치하고 하나의 오브제이자 색채로서 빛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후 플래빈은 여러 개의 형광등을 반복 배치하여 빛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간의 리듬을 선보였다. 그는 작품을 ‘무제’인 채로 두면서도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예술가나 철학자,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부제로 삼아, 관람자들이 나름의 내러티브를 꾸려 가도록 해석의 문을 열어 두었다. 이처럼 양면적 실험을 계속하면서 작가 스스로 신성함이나 초월성 등 빛의 종교적 의미를 강하게 부인했음에도, 공간을 부드럽게 장악해 가는 플래빈의 은은한 빛은 관람자의 시선을 멀리서부터 끌어당기며 숭고미와 사색을 이끌어내는 등 예기치 못한 미적 체험을 선사한다. 특히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348개의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초록색 장벽을 따라가다 보면, 원근감이 모호해지는 가운데 빛과 색이 일구어 내는 경이로움에 온통 휩싸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빛, 동시대 미술을 조명하다: 롯데뮤지엄 댄 플래빈展」에서
근대기 잡지는 계몽의 주요 수단으로, 그 표지는 잡지의 추구 방향을 드러내는 선전의 장이었다. 특히 여성지는 낮은 취학율과 높은 문맹율을 타개하고, 관습과 구태에 젖은 구여성을 일깨운다는 기치 아래 발행됐다. 1920년대에 발행된 《신여성》(개벽사)의 표지에는 신식 머리 모양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신여성은 새로운 유행의 선도자이자 생각에 빠진 성찰의 주체로서 그려졌다. 다만, 잡지 및 이미지 제작자인 남성 지식인들은 신여성을 근대성의 지표로 여기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상화했다. 신여성의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감정적, 신체적인 자율성과
가부장제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게 했으나 한편으로는 구경거리이자 남성 시선의 대상으로 고착되기도 했다. -「2018 신여성, 도착하다」에서
평생 수만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남겼을 정도로 치바이스는 다작(多作)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품이 최고의 격조를 유지한다. 흔히 목격하는 태작(怠作) 많은 다작 작가의 병폐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작품이 천재성 이전에 노력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흔하디흔한 소재를 일생에 걸쳐 무수히 반복 묘사한 결과, 대상의 본질과 미의 질서를 굵직하고 단순 명료한 필획으로 추출해 낸 것이다. 특히 그는 꽃, 새, 풀, 벌레의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물고기, 새우, 게, 개구리는 마치 화선지에서 뛰쳐나올 듯하다. 또한 푸른 산과 숲, 강 그림을 보노라면 산림과 물의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가 그린 인물화는 해학과 풍자,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치바이스는 초년에 생업으로 인물화를 즐겨 그리면서 뇌공(雷公)과 신선(神仙) 같은 상상의 인물은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기를 그쳤다고 한다. 생기가 느껴지는 그의 인물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국내 최초, 치바이스(齊白石)展」에서
누드는 과거 미술학도들이 역사화(歷史畵)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前) 단계에서 드로잉을 익히기 위한 훈련 과정으로 중요시됐다. 이후 근대에는 모더니스트들의 형식 실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장르이자 다양한 정치 활동과 정체성 논의가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누드는 사회 발전과 젠더 정치, 작품의 관람 환경에 따른 미학적·비평적 태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사회사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제다. 예컨대 누드는 시대에 따라 예술과 포르노, 인격의 표현과 인물의 재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러한 누드의 변천사는, 당대와 동시대 예술가들의 다양한 지향, 그리고 관람객이 작품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전개되어 왔다. -「200년 누드의 변천사」에서
‘나’는 ‘나’로 태어난 이상 ‘나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오로지 나의 시선으로, 나의 관점으로만 대상을 볼 뿐이다. 나는 한시도 나 아닌 자일 수 없으니, 나는 평생 내 안에 묶인 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동안 나는 (삶 전체에 비한다면)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해도 화가의 시선에 스며들어, 그가 보았던 세계에, 그가 보았던 방식으로 머무르게 된다. 그림이란 화가의 시선이 닿았던 바대로의 대상을 ‘다시’ 보여 주는 것인 만큼, 우리는 그 가상의 공간에서 그가 보았던 것, 그가 겪었던 세상을 다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는 계속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화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의 시선은 어디에 닿아 있나, 몬드리안이 간파한 자연의 모습은 어떠하고, 칸딘스키의 눈은 어느 우주를 떠돌다 왔나? 이와 같이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단지 ‘잘 그렸다’‘못 그렸다’ 정도의 판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공간으로의 섬세한 침투이자 나 아닌 ‘전혀 다른’시선으로의 적극적인 이행, 자기 개방의 활동이다. -「미술 감상 수업 - 즐겁게, 그러나 진지하게」에서
북한의 박물관은 예나 지금이나 비밀에 싸여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라곤 고작 평양이나 개성의 박물관이 전부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박물관을 본 사람들은 ‘볼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전시장에 복제품을 전시하고 원본은 소장고에 보관하며 변변한 도록조차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처럼 열악함에도, 2000년대 초반부터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한 각지의 13개 박물관에 소장된 500여 점의 유물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중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지식 퐁퐁 리스트: 북한의 문화재, 얼마나 아시나요?」에서
교육의 힘은 참 위대하고도 강하다. 청소년기의 나는 러시아 국기에 그려진 낫과 망치를 꽤 폭력적인 의미로 생각했다. 낫과 망치가 생산과 관련된 것임을 부끄럽지만 대학 가서야 알았다. 아마도 냉전시대 교육의 결과 그런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스스로 덧씌웠을 것이다. 붉은 광장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긴, 붉은 광장과 크렘린이 러시아 권력의 심장부를 상징하니 그 안에서 붉은색과 관련된 사건이 한두 건이었겠느냐 마는, 내 엉뚱한 상상과 달리 ‘붉은’러시아어로 끄라스나야)이라는 말에는 색상 이외에 아름답다는 의미가 함께 있다. 게다가 17세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었단다. 광장 주변에는 중요한 관광지가 모여 있고, 그 주변만 방문해도 기꺼울 만큼 광장은 충분히 아름답다. -「러시아 문화예술 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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