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묵조선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받았으며, 『묵조선 연구』『묵조선의 이론과 실제』『묵조선 입문』『선과 좌선』『선문답의 세계』『조동선요』『현대와 선』『게송으로 풀이한 금강경』『길장 금강반야경소』『금강경 주해』『규기 금강경찬술』『원효 열반경종요』등의 저서 외 기타 다수의 논문이 있다.
붓다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하여 그것을 해결하려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것이 곧 출가라는 행위였다. 출가라는 행위 자체가 벌써 고뇌에 대한 깊은 자각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고통을 자각하고 나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인지를 알려는 과정에서 그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서 생겨났으며,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고 한다. 그 알려고 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방식의 한가운데에 바로 선이 있다. 그래서 선은 붓다가 깨침의 방법으로 채택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가장 보편적인 수행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4쪽)
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선 수행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승이 화두를 제기하여 제자로 하여금 화두를 보게끔 하는 선 수행이다. 반면 제자가 스승에게 화두를 들어 질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그 답변의 행위에서 스스로 어떤 의미와 행위를 터득하는 선 수행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화두는 깨침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이면서 스스로가 타파해야 하는 도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곧 화두는 한편으로 도구로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그 자체가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10쪽)
묵조선의 경우는 수행하는 그 자체에 깨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곧 간화선의 좌선관이 깨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깨침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하여, 묵조선의 좌선은 수단이 아니라 좌선이 깨침이라는 목적 그 자체로서 깨친 자의 좌선이었다. 때문에 묵조선은 좌선 지상주의의 입장이다. 그리하여 간화선의 입장이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묵조선은 깨침을 위한 수행마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18쪽)
선종이란 좌선을 주요한 수행 방법으로 삼아 깨침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이다. 불교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는 간경 수행, 주문을 외우는 주력 수행, 좌선을 통하여 깨침을 추구하는 참선 수행, 기타 염불 수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좌선 수행은 좌선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좌선을 으뜸으로 삼아 일종의 공안, 곧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소위 간화선이다. 간화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 또는 ‘화두를 보게끔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화두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60-61쪽)
선종의 제2조 혜가가 “제 마음이 불안하오니 안심시켜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달마는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면 안심시켜 주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혜가는 오랜 수행 끝에 불안한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달마에게 고하였다. 이에 달마는 혜가에게 이미 깨침을 얻었다고 증명해 주었다. 이와 같은 제도 방법이 달마의 독자적인 방법이면서 소위 선적인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교학의 입장은 여러 가지의 언설을 동원하여 해설하고 들려주어 일정한 이법을 받아들이게끔 노력하는 데 반하여 선에서는 스스로 참구하고 발명할 수 있도록 그 문제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73-74쪽)
깨침은 본래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자각하여 그대로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어디서 빌려 오거나 한순간에 퍼뜩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특별히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대로 앉아서 화두를 든다든가 좌선을 하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화두를 통해서 좌선을 통해서 깨침이 얻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곧 대오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대의단이 아니라 한낱 쓸데없는 분별심일 뿐이다. (91-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