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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을 위한 여행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여행

: from Provence to English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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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4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376쪽 | 526g | 135*200*30mm
ISBN13 9791187504443
ISBN10 118750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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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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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월요일 아비뇽의 시청 앞 광장은 한없이 조용했다. 바람에 우산이 날아갈까 봐 두 손으로 우산을 꼭 쥔 채 총총 걷는 사람들만 드물게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려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몇 걸음 더 가서 보니 크리스마스 때문에 임시로 설치된 회전목마였다. 대목을 맞아야 하는 시기인데, 이상하게 쉬지 않고 내리는 비 때문에 손님이 들지 않는지 표를 파는 청년은 혼자 울상이었다. 손님은 고작 소녀 하나뿐이다. 요란하게 치장한 수십 마리의 회전목마를 저 혼자 전세를 내고 실컷 즐기고 있다. 그런 그녀를 딱 몇 발자국 곁에서 엄마와 아빠가 조용히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엄마, 아빠의 피부색과 소녀의 피부색이 너무 다른 거다. 소녀를 사진 찍을 생각으로 가만히 다가가 물었다.
(중략)
가족이란 말을 그렇게 자주 쓰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어떻게 특정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모호하다. 다만, 이들이 모두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아주 보통의 가족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이 어떤 별난 이름을 붙였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함께 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 서로의 적막을 밝혀주며 함께 삶의 뿌리를 심는 이들은 모두 보통의 가족이라야 마땅하다.
- PROVENCE/ 04/ ‘아주 보통의 가족’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든 당신 뒤에서 물끄러미
땀에 젖은 등을 만지다가
하나, 둘
척추를 센다.
당신이 살아낸
산과
골짜기와
절벽과
나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여기.
사람의 등뼈를 세는 일은
왜 이렇게 외로울까.
- SANTORINI/ 08/ ‘척추 세기 놀이’


금요일 밤이다. 한 주의 근무를 마친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8시를 넘어가며 시장은 북새통이 됐다.
남자들은 대부분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고, 여자들도 단정하게 정장을 입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곳 없이, 또 튈 곳도 없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목소리를 높인다. 정해진 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사람들 사이에 가장 반듯한 규칙과 그 규칙의 균열이 함께 사는 여기. 금요일의 사람들로 가득 찬 시장은 온통 피곤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분주함으로 묘한 생기가 돈다. 아메요코 시장의 풍경이다.
(중략)
한참이 지나 화장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밖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안쪽 칸에서 웩 웩 속을 겨워 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따고 나오는 사내의 얼굴을 힐끗 보니 아까 그였다. 내 뒤를 따라 나온 사내는 일행에게 돌아와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술을 자꾸 받아마신다. 그를 격려하려는 듯 옆에 앉은, 그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다른 남자가 그의 등을 툭툭 만져주었다. 그만 마셔도 된다는 뜻이었는지, 더 받아마시라는 의미였는지, 그 마음 그 처지 나도
다 겪어봤다는 말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억지 잔을 마다치 않고 잘 받아마시는 청년은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화장실을 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더 참지 못하고 있는 술을 조금 남기고 가게를 나오고 말았다.
어쩜 저리 열심의 삶인가.
어째 저리 있는 힘껏 최선의 날인가.
왜 그렇게 온 힘으로 살아내야 살 수 있는가.
아메요코 시장의 골목마다 열심히 사는 금요일의 부대가 가득했다. 앳된 얼굴의 막내가 최선을 다해 술을 받아먹고 있었다.
- ASIA / 05/ ‘술 받아마시는 청년’


아무 때나 언제나 당신이 오고 싶을 때 와.
나는 사람에게 집 열쇠를 내주는 일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엄청
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있거나, 내가 없거나 당신을 차가운
문 앞에 혼자 우두커니 세워두는 일은 않겠다. 저 오래된 책상이나
냉장고 같은 것이래도 이 집의 무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 거
리낌 없이 내게 들어오라, 나는 가득하게 당신을 맞겠다.
집 열쇠를 내주는 건 그런 일이다.
- LONDON / 06/ ‘열쇠 하나를 받아들고 당신 집에 들었다’


가만히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그고 뒤돌아서면 저렇게 많은 길이 말을 걸다 지나간다. 생각해보면 목마른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던 마음은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안에 일어나고 쓰러지는 많은 자기 의심을 피해 숨을 곳이 필요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막상 길 위에서 역시 자기에 대한 의심을 어쩌지 못했다. 삶이 여행이라는 건 실은 잔인한 말이다. 닿을 수 없는 집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게 될 거라는 뜻이다. 겨우 찾은 것들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다. 다른 세상에 언제나 목마르게 될 거다. 여행이 회피인 동시에 결국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몸부림이고, 자기를 다 가지려는 욕구라면 여행의 매 순간 실패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아주 오래 스스로 비겁하다는 생각에 잠겨있다.
(중략)
한때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가장 간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시선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정의하고 느낀다는 건 틀림없이 편안한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 그게 실은 얼마나 두렵고 고단한 일인지 생각하게 됐다.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는 건, 또 무엇이 귀한지 찾고 지킨다는 건, 더 나아가 그런 자신에게 당당하거나 심지어 때론 자기를 지운다는 건 어떤 결단이나 용감함이 있어야 하는 문제였다. 여행의 길마다 장면마다 그들이 있었다. 집 없는 곳에서 두려움을 지우고, 멀던 이들이 서로 만나 불을 지피며, 캄캄한 아래까지 자신을 들여다보는 우물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다시 우리는 속기로 하자. 무모하고 바른 날들이 저기 기다리고 있다고 믿기로 하자. 부끄럽고 무력하고 좁은 마음 깊은 곳으로, 깊은 곳에 이르러 더 깊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여행이다.
- WESTERN CANADA/ 16/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여행’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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