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최대의 경관인 하롱베이 행이 기차시각을 잘못 체크하는 실수로 좌절하되고, 하노이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운 좋게 같이 놀았던 엘리슨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 기차는 중국과 철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리오카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작은 버스로 갈아탄 일행은 몇 명의 외국인 일행과 같이 한시간 여를 산을 타고 올라가는 '사파'에 닿았다.(그곳에 대한 정보는 야후에서 'vietnam * sapa'로 검색하면 된다. 하지만 그곳에 맑은 공기와 햇살은 가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수십의 다른 종족이 토요일마다 모여 시장을 이루는 사파의 시장은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마약에 이르기까지 육상의 시장과 다름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하지만 그곳도 라다크처럼 시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오염되지 않았던 그곳의 공기와 햇살에 반해 나는 잠시 머물된 게스트 하우스 주인에게 신혼여행을 꼭 이곳으로 오고 싶다고 말했다.(아마 난 수년내에 아내와 그곳에 다시 갈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내 뇌리에 가장 깊게 자리한 것은 짧은 시간이나마 두루두루 머물렀던 호치민, 다낭, 후에, 하노이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일찍이 프랑스인들에게 '통킹의 알프스'라 불리었던 사파에서 리오카이로 내려오는 작은 미니버스였다. 나와 한 동행은 9인승 봉고차에 자리를 잡았고, 나 옆에는 작은 체구의 한 베트남 여인이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서먹해진 나는 용기를 내어, 옆에 앉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40살이지만 미혼인 그녀는 공무원으로 있었다. 내가 남주딘이라고 밝혔을 때, 그녀의 눈가에 잠시 스치던 작은 원망의 눈초리. 난 솔찍이 변명을 했다. 우리나라도 어쩔 수 없노라고. 나이로 보면 그녀도 참전을 했을 나이였을 법하다. 능숙한 영어에,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전쟁 당시 전사였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쉽사리 말을 더 붙일 수 없을 때, 난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슬픈 원망에서 난들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베트남인이 적대감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지마라. 작가 바오 닌이 한국 독자에게 주는 말에서 처럼 베트남인들은 온후하다. 내가 다낭에서 후에에 가는 미니버스 안에서 살을 부대고 가면서 눈짓으로만 이야기한 베트남인들 모두는 내가 남한 사람이라는 말에도 정겨운 눈빛으로 맞아주었다. 76년이니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를 온화한 눈빛으로 맞아주었다. 또 그렇다고 그들을 배알좋은 순딩이로만 알지 말기를. 그들은 엄연히 세계 최대 강국으로 자리하던 프랑스, 일본, 미국, 중국 등을 맞서 승리하거나 자신을 지켜냈다. 그들은 지금도 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가면 세계 5위권의 성적으로 우리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있으며, 동남아 호주에서는 가장 흉악한 폭력조직으로 위세를 날리고 있다.
소설 '전쟁의 슬픔'은 이런 베트남 민족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물량으로 머리위에 폭탄을 쏟아붓던 베트남전쟁에 관한 감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9년 청년병으로 전장에 나간 끼엔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을 현장에서 맛본다. 입대 때 500명의 여단이었던 동료들 가운데 10명만이 살아남았고, 그 당사자인 작가 바오 닌의 분신인 끼엔에게 전쟁은 지옥의 다름아니다. 자신들의 동료가 몰살했던 고이혼이나 폭격으로 처참한 비극을 겪었던 기차 등, 그에게 하노이에서 사이공의 탄손 나트 공항에 이르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탄손 나트 공항을 점령한 후에 교육받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끼엔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프엉과 결별한다. 슬픈 오해와 상처로 헤어진 끼엔이 이후에 의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수단인 소설이다.(작가 자신처럼) 프엉은 끼엔이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유일한 짝이자 영적으로는 화가인 끼엔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신비한 여인이다. 둘은 난관 속에서 계속해서 마음을 확인하지만, 끼엔의 아버지처럼 분방한 정신을 가진 이답게 분방하게 몸을 돌리는 것에 분노한 끼엔의 버림을 받는다. 하지만 이 역시 전쟁과 단절의 시간이 주는 오해와 숙명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미국을 통해 받아보던 베트남의 텍스트속에서 보던 교만과 오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목처럼 작가는 전쟁에서 이긴 것을 부각하기 보다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앞에 좌절해가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사고처럼 이웃의 삶속에서 위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자신은 전쟁이라는 폭력에 내던져지고, 그것을 기록하는 운명에 들어선 것의 비극.(그래서 이 책은 승리한 전쟁에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금지된 책이 됐다)
책에서 만나는 것은 전쟁의 비극만이 아니다. 안내조로서 끼엔의 일행을 안내하다가 발각 위험에 처하자 혼자 희생양이 되어 미군에게 강간당한 호아 등을 통해 보여지는 동료애, 인도적인 자세로 상대를 대하다가 희생되는 디안 등 전쟁이 주는 갖가지 상념들을 전달한다. 또 예술가로서 정신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끼엔 아버지의 모습이나 끼엔보다도 끼엔의 아버지를 닮은 프엉의 모습 등은 베트남 민족의 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 끼엔을 말하는 또 다른 전달자의 입을 통해 풀이되듯 끼엔은 편집증 환자, 혁명의 시대를 산 산 증인, 수많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유령처럼 밤거리를 떠돌아다닌 인물, 한 여자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영혼 속에 양성을 지닌 인물, 우리 시대에 마지막 남은 프티브르주아, 반항아, 득단주의자 등 많은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사실 인간이 어떻게 한가지 모습에 소명을 담고 인생 내내 매진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의 극단을 겪었다는 특수성이 있는 끼엔의 모습이야말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교과서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 '람보' 등을 통해 무참히 쓰러지는 베트콩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 편견과 무지의 덩어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그 무지를 넘어서는 위대함이 있다.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던 것은 역자의 말처럼 혼돈스러운 시제와 시점도 있겠다. 하지만 변역자의 언어가 좀 딱딱한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 별스럽게도 이 책이 다가온 곳은 이 책에서 만난 익숙한 지명들이다. 난 끼엔이 발이 부르트며 걸었을 그 긴 길을 비행기나 차로 다녔지만 그것의 이름들을 익숙해졌다. 이 책에서는 투윈꾸앙호수로 불리는 하노이 중앙의 호수를 난 '호안키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산책했었다. 한번은 여행으로 한번은 독서로 다가온 두 베트남에 대한 심상을 간직하며, 살아가야지 싶다.
--- 99/8/9 조창완(chogaci@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