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는 잎처럼 살고 싶다
꽃은 그 화려함만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어 뽐내려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색깔로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심지어는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꽃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잎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항상 겸허한 자세로 묵묵히 일해 나가는 농사꾼의 모습을 따른다. 단지, 태양을 향한 마음으로 빛을 구하고, 다른 생명체들이 쓰고 버린 공기( CO₂)와 토양에서 얻어 온 물, 약간의 무기물을 이용해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먹고 남길 수 있을 만큼의 풍족한 식량을 생산해 줄 뿐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자신의 존재가치를 내세우거나 과장하려 하지도 않는다.
잎은 봄철에 뿌려져 씨앗의 껍질을 벗고 새싹으로 자라나, 이른 새벽 동이 터 올 무렵부터 녹색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서, 한낮의 땡볕도 피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또한, 잎은 넉넉한 마음을 담을 수 있는 폭넓은 그릇을 갖고 있다. 농사지어 얻은 수확을 하고 나서도 겨우 자신의 기초생활을 유지할 정도만 남겨두고 모두 지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 해 줄기 속 통로를 통해 꽃으로 살고 있는 딸에게 보내기도 하고, 열매로 맺어진 아들에게도 보낸다.
가을이 오면, 잎은 한때의 화려함을 잃고 힘없이 죽어 간 꽃을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가진 것 다 털어 내어 이웃에 나누어주고, 이내 정갈한 갈색 수의로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잠시 낙엽이 되어 자유를 뒹굴다가 흙 속에 묻힌다.
잎은 자신의 고향인 흙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현미경으로나 겨우 볼 수 있는 작은 생물들에게까지 자신의 마지막 남겨진 몸뚱이마저 다 헐어내어 줌으로써 완벽한 나눔의 실천과 살신성인의 삶으로 마무리한다. 나는 짧고 화려하게 살다가는 꽃이기보다는, 길고 진지한 모습으로 일생을 지내다가, 결국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잎을 닮아보고 싶다.---본문 중에서
■ ■ ■ 여는 글
세상의 빛이라곤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서 가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어둠의 동굴 생활을 편안해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바깥이 어수선하여 삐죽이 문을 열고 나와 보았더니, 어떤 이는 「6ㆍ25 동란」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국 전쟁」이라고도 하는 일명 ‘동족 간 때려눕히기’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주로 지는 게임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지난한 질곡의 세월에도 내가 삶의 무게에 힘겨워할 때면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고, 아픈 영육을 부축해 일으켜주던 많은 은인이 있어, 지금 여기까지 용케도 잘 살아왔다.
그동안 천성이 게으름에도 마음만은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내 인생은 시간에 떠밀려 생의 종착점이 보이는 정상의 7부 능선쯤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한 번쯤 내려다볼 때가 된 것도 같은데, 희미해 보이는 내 발자취가 정갈하지 못하여 차마 내 뒤의 후세들에게 그 길을 그대로 좇아 올라오라고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내가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인생 오보록(誤步錄)’이다. 잠시 다리품을 쉬어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배낭 속에 담진 흔적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가지런히 정돈해 보려는 것이다.
솔직히 나의 속마음을 다 까발리고, 그나마 숨겨 두었던 치부까지 드러내기까지는 꽤 긴 망설임의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나의 모든 삶의 흔적들을 다 지워버리라.”고 유언을 남기셨던 요한 바오로Ⅱ세 교황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버리고 떠나기’의 무소유 정신을 강조하신 법정 큰스님,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남기시고 빈 그릇만 달랑 차고 선종해 가신 김수환 추기경님,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어 홀가분하다던 박경리 선생께서 자꾸만 나의 겸손치 못한 행실을 나무라는듯해 더욱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될 글들을 통해 그동안 주지는 못하고 그저 받기만 했던 지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공유하였던 추억과 인정과 의리를 나누어 가지는 것도 작은 보답일 수 있겠다는 이유를 들어 궁색한 변명으로 삼으려 한다.
이 글이 만약 책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순전히 가끔 메일이나 지역신문의 기고문을 통해 보내지는 나의 글을 읽고 변함없이 격려해 주시던 많은 지인, 특히 바쁜 일상 중에도 꼼꼼하게 독자의 눈으로 피드백하여 카운셀링해 주신 김젬마선생님, 강미경선생님 그리고 평생 친형처럼 나의 허물을 보살피고 조언해 주고 계시는 유상일 형, 내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고 계시는 안용호 교장 선생님 등께서 도와주신 덕분이라 여기고 싶다. 또한, 최근에 인연을 맺게 된 고영주 선생님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으며 표지 그림을 제공해 준 나의 형 같은 친구인 임병남 화백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막상 그동안 쓰인 글들을 모아 출간할 뜻을 가족들에게 밝히자, 내 인생의 가장 숙명적인 ‘안티 팬’으로 군림해 온 우리 집 마나님(?)께서는 “제발 이제는 이상의 눈을 감고 현실에 눈을 떠라”며 나의 무능한 현실 감각을 ‘눈 흘김’ 해 오고 있다.
2011년 10월
청양(淸陽) 강헌희 씀
---여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