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재산을 축적하려는 탐욕은 큰 위험인 만큼 깨어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주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도 재산을 소유하려는 여전히 강렬한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까닭입니다. 재산에 의지하거나 필요 이상의 재산을 축적하면 자기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재물의 소유나 풍족한 재산의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수명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것입니다. 돈은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돈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 ‘유산 상속 다툼’중에서
첫째,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발아래 땅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구원의 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무력함의 심연을 목격한 다음에야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형식적인 격려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은총’이라는 말씀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에게 각 사람이 최상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언급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를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걸고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 ‘부자 청년의 고민’중에서
이것이 바로 세속 재산의 문제에 대한 최후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소유 재산의 완전한 포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신 전반적 계율은 아닙니다. 신자는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할 정도로 내적 · 외적 포기를 실천할 의무만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각 사람의 신분에 따라 재산의 포기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신자라도 세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특은으로 평생 독신 생활을 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 있습니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엄중함과 냉혹함을 보여 주시고, 또한 당신의 후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은 현세에서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세상 종말에 더욱 부유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종말에 더욱 초라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인은 불성실한 종이 가지고 있던 1탈렌트마저 빼앗아 10탈렌트를 가지게 된 첫째 종에게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탈렌트(재능)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활용하며 효과를 맺을 수 있는 일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은 효과를 요구받을 것이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은 효과를 요구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받은 재능을 활용하여 충실히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써 수익을 올리기를 기대하십니다. --- ‘탈렌트의 비유’중에서
계시의 관점에서 경제 활동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소명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것이라 여기고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선물과 물질 보화를 잘 관리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정의의 활동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처럼 각자가 받은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간수하며 좋은 효과를 내야 합니다. 경제 활동과 물질적 진보는 인간과 사회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닌 믿음과 바람, 사랑으로 헌신한다면 경제와 진보도 구원과 성화의 자리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역에서도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는 사랑과 연대를 표현할 수 있고 앞으로 올 세상을 앞당기는 새로운 인류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중에서
진정한 정의正義, 진솔한 하느님 숭배 등이 올바른 정신으로 실행될 때는 그 행위 자체에 진정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순전히 외적 형식으로만 행한다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행한?면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행위에서든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선한 행위라도 그릇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위선의 악행이 되는 것입니다. 선행을 가장한 행위가 위선의 악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된 의로움과 거짓된 의로움의 행위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진실된 의로움과 거짓된 의로움의 평가 기준은 사람의 체면이나 평가를 위해서 행한 일인가, 또는 속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위해서 행한 일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선행의 배후에 자기 과시를 추구하는 정신이 숨겨져 있거나, 하느님의 인정보다 동료 인간들의 칭찬을 추구하거나, 하느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대신에 인간의 보상만을 노리거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라도 허영심 때문에 행하거나……. 이러한 외형적 선행은 하느님께가 아니라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행위는 내실 없는 공허하고 무가치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곁눈질하면서 행하는 것은 진정한 선행이 아니라, 선행을 위장한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만 선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선행을 한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의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진정한 의로움’ 중에서
엄청난 물고기를 건져 올린 시몬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목격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 안에 활동하고 계심을 목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시몬은 자신이 지극히 송구스러운 부당한 죄인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는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서 두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탄복한 시몬은 넋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 끌려가면서도 동시에 죄의식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몬은 지극히 숭고한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께 “주님”이라는 한마디를 외쳤습니다. 시몬은 이 기적에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고“주님”이라 부른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그분과 함께 있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 ‘첫 사도들의 성소’ 중에서
‘새 세상이 오면’,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현세가 끝날 때에 인류와 우주가 새롭게 태어남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이 뒤바뀌는 이때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정립하는 심판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현세에서의 가치가 전도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현세의 구세사에서 특전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 특전이 그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기에는 부족하여, 천국에서 유다인들은 제외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현세에서 특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환영하고,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 ‘주님을 따름과 그 보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