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제가 할 일이 뭔가요?” “그 얘긴 천천히 하죠. 아직 많이 힘들 텐데 저까지 보태고 싶진 않네요.” “괜찮아요. 지금 듣고 싶어요. 이제 갈 데까지 다 갔어요. 더 이상 힘들 일 없을 거예요.” 이환을 바라보는 진영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바짝 마른 낙엽처럼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처럼 성마르고 건조했다. “정 그러시다면 가면서 이야기하죠.” 이환은 손에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차문을 열었다. 진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거의 한 시간을 넘게 달렸는데도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환은 정면을 응시한 채 운전에만 열중했고, 진영 역시 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선 틈을 타 이환은 진영을 힐끗 보았다. 이환의 시선은 검은 머리에 꽂힌 하얀 리본에 잠시 머물렀다 핏기 한 점 없는 얼굴로 이어졌다. 백짓장보다 더 하얀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환의 시선은 목이 훤히 드러난 흰 소복으로 내려갔다. 이환은 무릎 위에 얌전히 얹어진 진영의 양손이 꽉 움켜진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환은 말없이 히터를 높였다. 히터 돌아가는 소리에 진영이 이환을 돌아보았다.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눈 좀 붙여요.” “고맙습니다.” 딱딱한 어조로 짧은 감사를 전한 진영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에 비친 진영의 두 눈은 공허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눈빛은 스물셋의 여자가 가질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환은 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환은 본가로 향하던 차의 방향을 틀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머물곤 하던 오피스텔 쪽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자신만의 공간 안으로 타인을 데려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체 같은 진영을 차마 감옥 같은 본가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차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지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진영의 고개가 연방 창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진영의 자는 모습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짧은 비명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이환은 차를 잠시 세우고 그녀가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젖혀 주었다. 그런데도 진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의 깊은 잠은 차가 그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한 후에도 깨지 않았다. “서진영 씨.” 시동을 끈 이환이 진영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녀의 팔이 툭 아래로 처졌다. 그녀의 이마엔 땀방울이 흥건히 맺혀 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숨결도 고르지 못하고 숨 쉬는 것도 힘에 부쳐 보였다. 이환은 진영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이마가 불덩이였다. 정신을 잃은 듯싶었다. 이환은 서둘러 진영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이 작은 몸에 너무 많은 짐이 얹어져 있었다. 그동안 쓰러지지 않은 것만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피스텔로 들어와 침대에 눕히는 데도 진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환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얼굴은 열이 올라 붉은 반점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온몸으로 슬픔을 담아내고 있는 진영의 몸은 처연했다. 그녀는 지금 동생을 떠나보내는 진통을 톡톡히 치러내는 중이었다. 동생의 죽음을 접했을 때 쓰러졌다 다시 깨어난 진영은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의연했다. 독하다고 주위에서 수군댈 만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버텨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안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 곁에 다가앉으며 핏기 없는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손끝을 통해 전해진 진영의 아픔이 그의 심장을 관통해 들어왔다.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통증에 놀라 이환은 진영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이환은 진영에게 닿았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상관없는 타인에게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환은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그가 회사에서 퇴근해 들어왔을 때, 진영은 간병사가 끓여준 죽을 먹고 있었다. “오셨어요?”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이환을 본 진영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 집에 온 후 진영은 꼬박 사흘 동안 앓았다. 아니 사흘 내내 잠만 잤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이다. “네. 이제 좀 괜찮아요?” 이환은 진영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일을 간병사에게 맡기고 퇴근할 때만 잠깐씩 들르곤 했다. “네.” 진영은 죽을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입맛 없으면 그만 먹어요.” 죽을 먹는 진영의 얼굴이 사약을 삼키는 사람처럼 고통스러워 보여 이환은 참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궿심히 먹고 기운 차려야죠.” 힘겹게 웃는 진영의 입술은 바짝 말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진영이 그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진영은 싸움이라도 거는 사람처럼 치열하게 죽을 먹었다. 그리고 말끔히 그릇을 비웠다. 간병사가 빈 죽 그릇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기다려 진영이 억지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있어요.” “아니에요. 이제 다 나았는걸요.” 이환 앞에 다가온 진영은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고마워할 일은 아닙니다. 목적이 있어서 도움을 준 것뿐이니까요.” “수술비 이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주셨어요. 살면서 남한테 폐 같은 거 안 끼치고 살고 싶었는데, 상무님께는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환은 진영의 지나친 감사가 무안해져 가벼운 농담으로 말을 바꾸었다. “어떻게 갚을 건데요? 장기 하나 떼어줄 건가요?” 그의 농담을 알아차린 듯 진영의 입가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필요하시면요.” “그건 저금해 두는 걸로 하죠.” “네.” “이제 우리 이야기 해야겠죠.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이환은 진영이 그의 앞에 앉기를 기다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삼 년 동안 우리 이지의 가정교사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진영은 고개를 들어 이환을 보았다. “왜 저 같은 사람을? 상무님이시라면 훨씬 능력이 좋은 분도 구하실 수 있으실 텐데요.” “동생에 대한 진영 씨의 그 헌신적인 사랑이 탐났으니까요.” “제 동생이니까요. 죄송하지만 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가운 성격이 못 돼요.” “이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진영 씨 때문에 동생을 많이 부러워했어요.”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 제안이었다. “실은 제가 곧 미국 지사로 떠나야 합니다. 삼 년 예정인데, 그 동안 이지를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요.” “다른 가족이 없으신가요?” “없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겁니다. 부끄럽지만 가족 중에 이지에게 신경 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보셨다시피 우리 이지, 혼자서는 거동도 힘든 아이에요. 거기다 마음까지 심하게 다쳐 있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동생에게 해주었듯이, 이지의 아픈 마음을 보듬어 안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진영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민영의 죽음을 통해 알아버렸다. “어떻게 절 믿으세요? 다 보셨잖아요,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제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민영을 떠올리자 눈동자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래서 더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이지에게도 딱 그만큼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진영은 이환의 말을 들으며 민영의 장례식장에 찾아왔던 이지를 떠올렸다.
이지는 처음 보는 민영의 영정 앞에서 소리를 죽여 훌쩍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 순간 시체처럼 한쪽 벽에 기대있던 진영은 그 울음에 이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언니. 정말 미안해요.” 진영을 바라보는 물기 가득 고인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민영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제 우리 민영이도 알았을 거야.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었던 것을…….” 진영은 이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비로소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민영을 닮아 따뜻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아이. 진영은 이지와의 만남이 준 그 선명한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문득, 진영은 이지를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짧은 회상에서 돌아온 진영은 다부지게 말을 했다. “민영이가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해 준 아이였어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상무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이지 곁에 있을게요. 지켜줘야 할 일이 생긴다면 제 전부를 걸고서라도 지킬게요. 지켜주지 못한 우리 민영이를 대신해서라도…….”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요. 우리 이지 잘 부탁드립니다.” 이환은 동생을 위해 하잘 것 없는 그녀에게까지 고개를 숙였다. 진영은 동생에 대해 말하는 이환의 표정에서 따뜻함과 안타까움을 읽었다. 진영은 이환에게서 아픈 동생을 지켜봐야 하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 역시 그래서 아무 상관이 없는 그녀 곁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것이다. 진영은 이제 자신이 그에게 돌려줘야 할 차례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