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경우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는 매우 기박한 가족사적 현실 면모의 양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미국에만 가도 다양한 인종들의 결합에 의한 혼혈, 피가 다른 형제들의 패밀리 구성 양상은 백사장에서 모래알을 줍듯 얼마든지 흔하게, 숱하게 발견할 수 있는 사회생물학적 현상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가난이 문제이고, 라깡의 이론처럼 사회적 대타자의 윤리 담론들이 문제이다. 한국이라는 좁은 사회는 끊임없이 공동체의 예외적 존재들을 언어 작용을 통해 추방하며, 사회적 건강(?)과 안녕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앞서, ‘수다’가 정신 건강을 위한 사회적 특효약의 하나인 것처럼 얘기했듯이, 사람들은 수다, 즉 뒷공론과 노골적인 앞 공론들을 통해서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며, 또한 자신들의 건강을 유지하고자 한다. 여기에 희생자가 일본어의 표현을 빌리면 ‘이지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무서운 것은 사회적 타박과 비방이다. 현대 사회에서 앞장서서 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기자와 PD 등의 존재들인 것이지만, 그 아픔을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참으로 형언하기 어렵다. 결국 아이들의 상처, 유년기의 상처는 고스란히 사회적 공동체의 대타자가 가정 내부로 함입해 들어오는 양상이며, 어려운 시절 폭군의 남성들은 그 사회적 냉대, 억압을 가정 내부로 돌려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적 존재의 현실, 가족사적 억압의 현실을 뚫고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