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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10이동
리뷰 총점8.3 리뷰 8건 | 판매지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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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1999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415쪽 | 541g | 148*210*30mm
ISBN13 9788987608112
ISBN10 898760811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1. 궁전 짓기
2. 첫번째 이미지: 두 명의 전사
3. 첫번째 그림: 파도에 빠진 사도
4. 두번째 이미지: 후이후이족
5. 두번째 그림: 엠마오로 가는 길
6. 세번째 이미지: 이익과 수확
7. 세번째 그림: 소돔의 남자들
8. 네번째 이미지: 네번째 그림
9. 궁전 안에서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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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10/12 조창완(chogaci@hitel.net)
시모니더라는 귀족 시인이 화려한 파티에 참가했다가 자기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강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시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시모니더는 참가자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시체의 주인을 찾아낸다. 이후에 서양에는 기억술을 다루는 학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는 마테오 리치 역시 이 기법을 교육받던 시절에 배웠다고 한다. 기억술이란 연상을 이용해 체계를 세워 많은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리치 역시 엄청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새로 번역된 조너선 D 스펜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사실 마테오 리치나 중세의 기교 많은 이들이 갖고 있었을 재주의 비상함 보다는 중국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고, 그곳을 완성된 구조물인 책으로 만들어내는 작자 스펜스의 재주에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돌아보니 올해 내에 내가 읽은 스펜스의 책만 해도 3권이다.

어학 시간에 그리 길지 않은 단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내 기억력이 그리 나쁨을 탓하지 않는다. 인간은 어차피 망각을 필요로하는 존재니. 하지만 스펜스처럼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일관(一貫)하며 책을 써내는 이들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특히 문학적인 능력이나 과학적인 분석능력까지 겸비한 이들을 보면 그 부러움은 더욱 커진다.

이번에 만난 스펜스의 책 '마테오...'은 이전의 책에 비해 시간도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중세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하지만 단지 스펜스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녹녹치 않은 책을 들었다.

책은 스펜스 특유의 매끄러운 이야기체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마테오 리치가 생존했던 1550년대부터 1610년까지다.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포르투칼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고, 1582년 마카오로 중국에 들어와 북경에서 죽을 때까지 중국에서 생활했다.

스펜스는 이 시간대를 그대로 거슬러가서 이야기를 쓴다. 그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마치 그 시대에 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한다. 거기에 그는 간간히 리치가 보낸 편지들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더욱 스펜스의 말을 믿게된다. 특히 이 책 작업이 원초적으로 어려운 것은 배경이 400년 정도 앞이라는 것도 있지만 자료가 부실한 편인 중세의 유럽과 중국을 넘나들면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스펜스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펜스 자신의 역량도 있지만 그의 작업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의 도움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펜스가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의 궁전을 세웠다면 마테오 리치는 당시에 유럽에 소개됐던 '동반견문록'이나 우리에게 소개되어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실 천주실의는 한국 사상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미 다산 정약용 등은 물론이고, 개화사상가들에게 이 책이 읽히고 영향을 주었으니 적지 않게 큰 책이다.

책을 읽고도 대강 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기억술의 방식인 '기억의 궁전'은 많은 흥미를 일으킨다. 리치가 참석했던 진사(進士) 모임에서 글자를 암송하고, 거꾸로 기억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흥미를 끈다.(185p) 하지만 리치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포교다.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을 만들고, 그것을 종교적인 관심으로 이끌려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이 책의 체계는 리치가 지시해서 지필묵 제작자인 청다웨가 그린 '정씨묵원'의 그림과 '무(武)'자, '리(利의)'자 등의 글자 풀이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마테오 리치가 만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소돔의 남자들'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가치관을 책에서 심으려고 노력한다. 로마에서 강력한 종교정치를 폈던 교황 바올로 4세의 죽음이후 벌어지는 혼란상과 중국에서 횡횡했던 동성애 등의 비판을 책은 담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작가의 사고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펜스의 의도가 그렇고, 리치의 의도가 그렇듯 타락과 종교와의 관계는 그리 선명하지 못한 것 같다.

마테오 리치의 전기이자 비교문화서 같은 이 책은 국내에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한 '아날학파'의 글쓰기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스펜스 특유의 힘으로 포장된 글쓰기다. 문제는 그를 받아들이기에 나의 사고와 리치의 시대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스펜스는 리치가 <기술>에서 이야기한 기억법, 곧 기억의 궁전을 지는 법을 제1장에서 설명한다. 이어 기억의 궁전에 세워두었던 무(武)·요(要)·이(利)·호(好)의 네 가지 한자 이미지와 <정씨묵원>이라는 책에 리치가 직접 골라 넣은 4점의 기독교 성화를 가지고 책의 나머지 8장을 구성한다.
--- p.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지은이는 기억법, 곧 기억의 궁전을 짓는 법(1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기억의 궁전은 리치가 중국인에게 기억술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책인 『기법』(記法)에 기초해서 짓는다. 리치는 기억의 궁전을 지으면서 궁전 안 연회실의 네 모퉁이에 대표적인 네 개의 이미지를 세워두었다. 그것은 한자(漢字)로 武, 要, 利, 好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은이는 『정씨묵원』(程氏墨苑)이라는 책에 나오는 리치가 고른 4장의 그림을 리치의 삶을 재구성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로 선택했다. 그것은 성서 속의 이야기를 묘사한 <바다에 빠진 사도> <엠마오로 가는 길> <소돔의 남자들> <성모자 성화>이다. 지은이는 이 네 개의 이미지와 네 장의 그림을 마치 슬라이드처럼 번갈아 보여주면서 리치라는 인물과 16세기 동서양이라는 대조적인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2장 ‘두 명의 전사’는 ‘武’의 기억용 이미지다. 武자를 대각선 방향으로 나누면 창 ‘과’(戈)와 그칠 ‘지’(止)가 된다. 따라서 武는 전쟁과 평화를 모두 함축한 글자인 것이다. 그러면 왜 리치는 武를 생각했을까? 16세기의 서양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 등으로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 중, 일 3국이 대 전란에 휩싸였다. 이런 혼란기일수록 평화에 대한 갈망도 클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리치가 창조한 ‘武’의 이미지에서 그것을 본 것이다.

3장에 나오는 ‘파도에 빠진 사도’ 그림은 험난한 해상여행을 암시한다. 여기서의 사도는 베드로이다. 당시 세계의 바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양분하고 있었다. 제해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력다툼의 역사와, 바다를 항해하는 이야기가 3장 전반부의 내용이다. 리치는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마카오까지 왔다. 그 여행은 마치 물에 빠진 사도 베드로처럼 믿음을 시험받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3장의 후반부는 중국의 내륙수로를 다룬다. 중국이 바다로 진출하지 않고 내륙수로, 곧 운하교통에 집중한 점을 리치의 눈을 통해 관찰하고, 운하여행이 바다여행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리치의 경험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다.

4장은 두번째 이미지 ‘후이후이’(回回)족이다. 후이후이족 여성은 ‘要’의 기억용 이미지다. 要를 위 아래로 나누면 ‘西女’, 곧 서쪽의 여인이 된다. 지은이는 이를 통해 리치의 눈에 비친 중국의 서양인, 서양의 문화, 서양의 종교를 이야기한다. 당시 중국 서역에는 이슬람 교도가 많이 살고 있었고,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 교도(景敎徒)와 심지어 유대교도까지 있었다. 리치는 이 서양의 3교가 유교, 불교, 도교가 뿌리를 내린 중국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했다. 리치는 그리스도교와 가장 유사한 교의를 가진 중국의 종교로 유교를 주목하여 스스로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유학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언행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리치는 자신을 ‘기인’(畸人), 곧 ‘역설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5장에서는 두번째 그림 <엠마오로 가는 길>을 통해 리치가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마치 두 사도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엠마오로 갔듯이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더듬어간다. 그런 점에서 5장은 압축된 리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단순한 연대기적 사실이 아니라, 과연 리치가 중국에 전한 서양의 문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리치가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아주 상세히 기술한다. 이것은 리치가 중국에 서양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5장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학문이 소개된 것도 리치의 저작을 통해서였던 만큼, 조선 후기의 서양인식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장은 ‘利’의 장이다. ‘利’를 좌우로 나누면 곡식을 뜻하는 ‘禾’와 칼을 뜻하는 ‘刀’가 된다. 그래서 리치는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를 기억이미지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利’는 경제행위와 직결된다. 6장은 바로 16세기의 경제 이야기이다. 앞부분에서는 무역, 구체적으로 비단무역이나 은의 유통 같은 당시의 세계경제가 하나의 배경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문제, 리치는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라는 의식주의 문제를 다룬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온 리치이지만 그도 종교와 경제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유능한 재정관리자로 변해 간다. 리치는 전교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절히 기부금을 받고, 재정을 잘 운용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한 모습을 중국인에게 보여주었다. 또 리치는 중국의 관리나 지식인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대단히 효과적임을 알고 많은 선물을 했으며, 황제에게도 많은 선물을 바치고 마침내 베이징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돈벌이를 하지 않는 리치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일부 중국인들은 리치가 전교사가 아니라 은을 만드는 연금술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리치의 양면적인 모습, 곧 종교인의 모습과 실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일화이다.

7장에는 <소돔의 남자들>이란 그림이 등장한다. 타락한 도시 소돔이 멸망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이 그림을 통해 리치는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중국인에게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도덕한 행위란 성(性)적 문란을 의미한다. 지은이는 16세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연했던 매춘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죄악시했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 사내 ‘男’자에서 힘 ‘力’자 대신 계집 ‘女’를 붙인 ‘기’(?자가 있다. 이 ö? 저장(浙江) 지방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동성애, 비역을 뜻한다. 저장성은 16세기 이전부터 동성애가 가장 많았던 지방이었다고 한다.

8장에선 네번째 이미지 아이를 안은 여자, 곧 ‘好’와 네번째 그림인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 곧 성모자 성화가 제시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리치 자신이 성모신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중국인이 ‘십자고상’(十字苦像)보다 성모 성화나 성모자 성화에 덜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밖에 리치의 불교 비판이나 명 말의 사상가 리즈(李贄)와의 만남, 그리고 리즈의 죽음을 다룬 부분은 아주 흥미롭다. 이 책은 리치가 자신이 세운 기억의 궁전의 문을 닫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 기억의 궁전은 오랫동안 독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겨 줄 것이다. 리치가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듯이.

회원리뷰 (8건) 리뷰 총점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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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술을 매개로 한 16세기 동서문화 교류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수퍼스타 눈* | 2015.11.09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북소리]를 통하여 토니 주트교수를 여러 번 소개한 것은 근세사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시각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토니 주트는 타계하기 전에 루게릭병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것입니다. <기억의 집; http://blog.joins.com/yang412/13652730>의 서문에 그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루게릭병이 진행되어 사지가 마비되면 누군가의;
리뷰제목

[북소리]를 통하여 토니 주트교수를 여러 번 소개한 것은 근세사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시각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토니 주트는 타계하기 전에 루게릭병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것입니다. <기억의 집; http://blog.joins.com/yang412/13652730>의 서문에 그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루게릭병이 진행되어 사지가 마비되면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는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트교수는 생각하는 것만큼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시간이면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서로 맞추어 갖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는데, 그 때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의식의 흐름에 고랑을 파는 작업으로 비유한 주트교수는 밤새 파놓은 고랑들이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다시 파묻혀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중세 기억술사들의 기억방식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중세의 기억술사들은 보고들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는 것인데, 주트교수는 자신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스위스 빌라르 지방의 작은 마을 체지에르에 있는 살레라는 이름의 가족호텔을 이용하여 정리된 생각들을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주트교수는 자신이 이용한 기억의 방법을 두어 쪽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역사학자 프랜시스 예이츠가 쓴 르네상스에 관한 에세이들에 멋지게 소개되어 있으며, 조너선 스펜스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을 주트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셈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리치가 설명한 기억술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난 리치가 1610년 5월 11일 중국의 베이징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행적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까지라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의 신흥강국들이 유럽을 벗어나 아시아로, 아메리카로 세력을 넓히던 대항해시대입니다. 리치가 중국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보면 피렌체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포르투갈의 대학도시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어를 배운 다음 인도의 고아와 코친에서는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말라카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것이 1582년입니다. 다음 해 중국의 자오칭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전교를 시작하여 사오저우, 난창,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거주허가를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리치가 중국인, 특히 관리들과의 관계를 맺는데 기여했던 것이 바로 기억술이었다고 합니다. 리치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만력제가 다스리던 명나라의 말기입니다. 제국의 말기에 흔히 나타나는 혼탁한 사회상이 노정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명나라 역시 과거에 급제해야 입신양명이 가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둔 식자층이라면 당연히 리치의 기억술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기억술은 리치의 인맥관리에 중요한 기술이었던 셈입니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리치의 기억술을 설명하는 ‘궁전짓기’에 이어 리치의 행적을 4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각 시기의 도입부에는 리치가 남긴 성화 넉 점을 담고, 이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넉 점의 그림들은 리치와 친분이 있던 베이징의 출판업자 청다웨가 출간한 중국 서화집 <정씨묵원(程氏墨苑)에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청다웨는 서양 그림과 로마자를 책에 담고 싶어 리치에게 부탁했던 것이고, 리치는 이를 통하여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 생애의 주요 장면과 성서의 극적인 장면들을 기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리치가 그리고 주석을 달았던 그림들은 갈릴래아 바닷가의 그리스도와 베드로, 엠마오로 가는 그리스도와 두 제자, 주님의 천사 앞에서 눈이 멀어버린 소돔의 남자들, 그리고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림입니다. 리치는 그림들이 기억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기억의 궁전 자체의 기전을 보강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고 들은 것이 오래 가지 않거나, 잘 못 기억하고 있어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곤 하는 저로서도 기억술을 습득하여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의 첫 번째 장, ‘궁전짓기’을 특별히 집중하여 읽었습니다. 궁전 짓기, 즉 정확한 위치짓기를 통하여 기억을 훈련한다는 생각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연회가 열린 홀이 갑자기 불어 닥친 강풍에 무너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죽은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시모니데스는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서 시체를 확인시켜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시모니데스의 기억이 정확하였을까요? 사실 사람의 기억이 저지르는 오류를 지적하는 책들이 많습니다만, 대니얼 L. 샥터교수의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http://blog.joins.com/yang412/12562617>은 읽을 만한 것 같습니다.

 

시모니데스 이후 기억술은 발전을 거듭하여 리치가 대학에서 공부할 무렵에는 수사학과 윤리학 수업의 기초과정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수사학자 치프리아노 소아레스의 <수사학>은 1570년대 예수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억술은 모든 웅변의 뿌리, 곧 ‘웅변의 보고’로서, 기억술에 의해서 사물 뿐 아니라 말을 어떻게 정리하고 또 이 기술을 어떻게 말의 ‘무한한 진보’에 이용할 수 있는 지를 기록했다.(25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극적인 다양한 이미지들을 창출하고 그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기억을) 배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는 궁전 같은 건물이나 웅장한 성당 등이 제시되었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억술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의과대학의 해부학 문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3층짜리 생리학건물의 옥상에 있는 ‘두개골 방’에 프랑스 국기 같은 삼색 침대보에 관능적인 여인이 벌거벗고 누워서 작은 손으로 구겨진 100달러짜리 지폐를 수북하게 움켜쥐고 있는 이미지를 배치하고, “손님을 기다리며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게으른 프랑스 매춘부(Lazy French Tart Lying Naked In Anticipation)”이라는 문장을 연관시킵니다. 이 문장에는 두개골의 눈구멍 위를 흐르는 신경의 명칭, 눈물샘(Lacrimal), 앞이마(Frontal), 활차(Trochlear), 외측지(Lateral), 코모양체(Naso ciliary), 내측지(Medial), 외전(Abducens) 신경을 의미하는 두문자를 담고 있습니다. 리치는 중국어로 쓴 <기법>이라는 기억술에 관한 책에서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각각의 장소에 배치하고 일관된 설명을 붙여 기억술을 익힐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6세기 무렵 이와 같은 방식의 기억술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530년대에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라는 사람은 <기술과 학문의 공허와 불확실함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기억술이 날조한 ‘기괴한 이미지’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연스런 기억력이 둔화된다고 말했다.(33쪽)”라고 적었으며,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기억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묘기가 얼핏 보기에는 인상적이기는 하나 광대의 속임수에 불과한 쓸모없는 기술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지난주에 [북소리]에서 소개해드린 세기 히로시의 <나를 위한 교양수업; http://blog.joins.com/yang412/13774397>의 핵심처럼 “얻은 지식들을 횡적으로 연결하여 ‘넓은 시야와 독자적 관점을 얻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기억술로 얻은 지식들은 그저 자기 과시욕을 채우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리치가 중국에 머물던 시기는 왜가 조선을 침략하는 국제적인 사건이 있었던 만큼 명나라에서도 외국인의 동향에 민감하고 전쟁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1603년 필리핀에서는 마닐라에서 급증하고 있던 중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선제공격을 해서 2만명에 달하는 중국인 이민자와 상인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카오에서는 예수회원,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일본인 들이 연합해서 마카오를 중국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한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중국인들이 마카오를 떠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우편제도가 없던 당시만 해도 멀리 나가있는 사람들이 고향에 소식을 전하려면 오가는 사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소식이 오가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인편이 오가는 중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어서 소식이 전해진다는 보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 예수회 분부 등에 소식을 전하거나 전교에 필요한 책이나 물품을 부탁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명대에 이미 중국에는 유대인, 아랍인, 유럽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가지고 온 종교의 의식을 치르는 예배당까지도 짓고 살았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중국인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를 중국에 소개하였는데, 리치만하더라도 중국의 문헌을 유럽에 번역소개하기도 하였으며, 중국어에 익숙해지면서 유럽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거나 직접 집필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리치는 예수회의 사제로서 전교를 목적으로 중국에서 살았던 것인데, 특히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서양의 과학지식과 신학상의 수양을 원용하면서 기억술을 이용하여 중국인들의 전통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배제하고 예수교를 믿도록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겠습니다.

 

리치는 저술을 통하여 중국의 전통종교의 본질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리치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 인간의 영혼이 여러 형태의 동물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윤회설로부터 온 것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은 유럽인들의 도덕적 관념이 방만하던 시기에 고안된 우화적인 교훈에 불과한 것으로 오류로 가득한 윤회설이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입니다. 리치가 윤회설을 강하게 부정한 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는 천지창조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리치의 불교관에 대하여 당대의 유학자 위춘시는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 불교를 비난할 만큼 불교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도덕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리치가 불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위춘시는 리치에게 꼭 읽어볼 불교서적 목록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리치는 불교가 십계명의 첫 계명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 지난 2천년에 걸쳐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불교가 과연 중국인들의 도덕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냐고 반문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중국의 지식층들은 리치가 타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궤변만 늘어놓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리치는 자신에 대한 중국 고관들의 비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중국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덧없으며, 그리스도인만이 내세에서 영원히 환희로 가득 찬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 리치는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기술, 책략, 훈련, 기억술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리즘, 시계, 성화, 유클리드 기하학, 책자, 만찬, 교부 등을 성모의 성스러운 인도 아래 총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삶을 신념을 지키며 살아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마테오 리치야 말로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절대적 진리였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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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로 서술한 역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o*****t | 2007.07.17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책의 제목이 멋지다. 내용 또한 기억술의 이미지를 사용한 독특한 역사 서술로 전혀 무리없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풀어냈다.   대부분 역사책의 한결같은 서술방식을 탈피하고 "마테오 리치" 라는 인물의 특성에 맞게 독창적이고 프로페셔널하게 역사를 서술한 이 책, <기억의 궁전>. 당시 중국의 시대상에 관심이 있거나, 새로운(그러면서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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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멋지다. 내용 또한 기억술의 이미지를 사용한 독특한 역사 서술로 전혀 무리없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풀어냈다.

 

대부분 역사책의 한결같은 서술방식을 탈피하고 "마테오 리치" 라는 인물의 특성에 맞게 독창적이고 프로페셔널하게 역사를 서술한 이 책, <기억의 궁전>.

당시 중국의 시대상에 관심이 있거나, 새로운(그러면서 전혀 어색하지 않은) 형태의 역사책을 보고싶은 독자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사족으로 기억술에 대한 저자의 좀더 심도있는 해설도 기대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역사 위주의 책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샀기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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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찾아, 마테로리치의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2003.03.29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우리에게 친숙한 전기는 한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배경, 성장, 활동, 업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으로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평가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전기는 반드시 그렇게 구성돼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을 읽는 순간,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스펜스는 그러한 전기의 구성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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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친숙한 전기는 한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배경, 성장, 활동, 업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으로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평가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전기는 반드시 그렇게 구성돼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을 읽는 순간,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스펜스는 그러한 전기의 구성방식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당혹스러움은 이 책을 놓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전기의 지평을 확장한 역사학자! 나는 '조너선 스펜스'를 "역사를 연주하는 시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어낸 그의 애칭이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며 평가하는 기존의 역사가와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스펜스의 역사는 소설과 시가 어우러진 한 편의 문학처럼 서정적이다. 거기에다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스펜스 쓴 역사가 과거에 과연 실제로 있었을까하는 의혹마저 생긴다. 하지만 그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가 분명 "사실 그대로이다"란 것을 깨닫게 되고, 그의 탁월한 구성력과 문장력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역사를 이처럼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사실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재미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어째서 기존의 역사가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지만 어떤 찬사로도 스펜스의 "심미주의적 역사학"을 평가하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분명 스펜스에 매혹되어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서평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짓기 위해, 스펜스의 '매혹의 강'을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써야겠다. 중국학의 거장으로서 스펜스가 보여주었던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의 또 다른 역작인 "천안문"과 "칸의 제국"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이 책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역사적 인물의 전기란 점에서 그의 기존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얼핏 제목만 보아 한 개인의 전기에 국한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의의가 있는 '스펜스의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 살았던 시대를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완벽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그의 전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이탈리아 포르투갈 인도 중국의 역사가 교차하고 서양근대의 종교사와 근대중국의 사회종교사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마테오 리치의 시각을 통해 일차적으로 접근되지만, 최종적으로 스펜스의 관점을 통해 재여과된다. 물론 그 여과과정에서 스펜스의 문학적 심미안이 가미되며, 또한 역사학자로서 그의 탁월한 혜안이 덧붙는다. 스펜스의 이 야심찬 시도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구성력에 있다. 스펜스는 중국에서 마테로 리치를 일약 명사로 부각시켰던 그의 기억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테오리치가 그의 '기억의 궁전' - 이 지점에서 스펜스는 마테오 리치의 관념의 영역을 탐색한다 - 에 배치했을 법한 이미지를 매개로, 스펜스는 스토리의 큰 틀을 짜고 있다. 바로 이 이미지에 따라 동서양의 종교가 충돌하는 장엄한 서사시가 펼쳐진다. 그의 기억의 궁전을 채웠을 법한 상징적 이미지의 한자는 바로 '무(군대와 전쟁의 의미)' '요(필요와 당위의 의미)' '리(이익의 의미)' '호(좋아하다의 의미)의 네가지이다. 이것들은 리치의 기억술을 과시하기 위한 단순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바로 이 네가지의 이미지를 주제로 마테오리치 생애의 긴 여정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가령 '무'의 이미지는 해상전쟁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토리의 매개체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요'의 이미지는 신앙을 비롯한 종교문제, '리'의 이미지는 무역과 조공을 비롯한 경제문제, '호'의 이미지는 성모마리아 및 동서양간 종교의 충돌 과정을 다룬다. 번역의 꼼꼼함도 이 책을 읽는 묘미 중의 하나다. 이 책의 주석을 통해 보건데, 일본의 번역수준이 얼마나 섬세하고 발달돼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일본판 번역자는 스펜스가 인용한 주석의 모든 자료를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확인해 ,스펜스의 부분적 오류를 수정하기 까지 했다. 물론 한국판 번역자인 주원준씨 역시 일본판 번역본을 확인함으로써 더 나은 번역을 시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한 번역자의 노고로 이 책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펜스의 작품은 언제 읽어도 참신하다. 특히 이 작품은 전기의 새로운 시도이자, 새 지평을 연 수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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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 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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