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역문학 연구의 의미와 방향
1. 지역문학 연구의 의미
과거 그 자체는 변함 없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역사는 계속 새롭게 쓰인다. 문학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계속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것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문제의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역문학 혹은 지방문학사의 등장은 변화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지금까지 큰 것들에 의해 가려지거나 소홀히 취급된 것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가 담겨 있다. 오늘날 지역문학사의 등장은 분명 이러한 가치의 전환과 관련이 있다. 역사학계에서 미시사라 일컬어지는 이러한 작은 이야기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장-프랑수아 리요타르가 거대 이야기의 종말이라고 특징지은 포스트모던과의 관련 속에서 나타났다.
미시사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구현하려는 역사적 인간학의 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미시사는 전체사로서 사회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전체사로부터 소실되거나 가려진 역사들을 찾아내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역사에서 작은 것의 소중함은 거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고, 또한 때로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연쇄 작용이 역사의 큰 흐름 자체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등한시되었던 작은 것들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미시사는 역사 속의 작은 인간들을 평준화시키는 것에 저항한다. 미시사가들이 목표로 하는 역사 서술은 전체사적인 시각에 의해 예외적이거나 사소한 것으로 제외된 것들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 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시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역사의 새로운 정의는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지역문학 연구 또한 이런 관점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지역문학 연구란 문학을 지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미를 찾는 연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문학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첫째, 그동안 우리 문학사를 지배해 왔던 사고 모델은 서구의 내재적 발전론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성 모델이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문학사가 다원주의 문학사가 아닌 계급 내지 계층 중심의 단선적 문학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한국사에서 뿌리 깊게 작용해 온 중앙과 지역 사이의 불평등 관계를 비롯하여 지역과 지역 사이의 갈등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이 계급 내지 계층이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 사상되거나 은폐되어 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계급?계층 위주의 거대 담론은 그것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중앙 중심의 획일주의 문학사를 조장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역문학’의 관점은 이러한 획일주의 문학사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하고도 적절한 방법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둘째, 그간 우리 문학사는 시대사 중심의 거대 담론을 지향하였다. 그 결과 늘 지역의 관점과 다양성은 무시된 채 어느 하나의 문학을 대표로 하여 그것을 시대적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어느 하나가 전체를 대표함으로써 그 외 다른 문학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문학사 서술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배제되기 일쑤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한쪽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된 반면, 다른 문학은 거꾸로 지나치게 평가 절하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조선후기 서울의 유흥을 주도했던 여항인들의 통속적인 문학이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되는가 하면, 반대로 지방사회의 문학은 봉건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매도되곤 하였다. 시대사 중심의 거대 담론은 이처럼 소위 주변부의 문학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소위 대표문학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지역문학’의 관점은 하나의 대안이 되어줄 수 있다. 지역문학의 관점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개개 문학의 문제의식과 가치, 의의를 보다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모든 문학은 지방문학이요 지역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문학은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며, 따라서 지역성을 고려치 않은 문학 연구는 대부분 추상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역문학적 관점을 통해 자칫 관념적이고 이론적으로 흐를 수 있는 문학사 이해를 지양하고 보다 생동하고 생활에 가까운 문학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선행연구자도 지적했듯이, 이제 문학 연구의 단위를 다시 설정할 때가 되었다. 민족국가의 문학을 통괄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그 하위 단위의 문학을 또한 중요시해야 할 때이다. 이때 하위 단위의 문학은 소수자 문학?지방(역)문학?특수집단문학이다.
2. 지역문학 연구의 방향
현재 우리 고전시가를 지역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한 사례는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전시가를 일정한 지역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찍이 누정문화(樓亭文化)나 계산풍류(溪山風流)에 주목하면서, 특정 지역의 문화 창조 집단의 인적 구성과 활동을 다른 지역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최근 들어 규방가사를 하나의 지역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 논문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강이나 낙동강 등 일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던 문학 내지 문화 활동에 대해 주목한 연구도 있다. 고전시가의 권역을 벗어나 한문학 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18세기 이후 서울에서 형성, 발달하였던 다양한 시사나 동호인 집단에 대한 연구, 강화와 안산 등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활동했던 학파 및 문학 집단에 대한 연구 등 방법론적 차원에서 지역문학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연구가 상당수 축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민요, 설화 등 구비문학 방면의 연구 성과 또한 만만치 않을 정도로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역문학 연구는 아직 본격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지역문학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있다.
우리는 보통 지역문학을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문학의 총합으로서 인식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역성을 형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문학 연구란 문학을 지역별로 모아서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문학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역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 있어 먼저 유의해야 할 점들이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지역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특정 지역의 문학 행위를 논의할 때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맥락이나 역사적 형성 과정은 무시한 채 그것을 지역의 근본 속성으로 돌리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우리는 총체적이며 불변적인 어떤 신비적인 것으로 문화를 인식하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둘째, 어떤 특정 지역의 지역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 지역성은 항상 다른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