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모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들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 찬란하고 오묘한 불빛이 자신에게도 불똥이 되어 튈 줄은 전혀 모르고 마냥 신기함과 뭉클함, 거룩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도배하곤 한다.--- p.13
이렇게 엄마가 된 딸들의 죄목은 줄줄이 사탕을 엮고도 남는다. 물론 그중 가장 으뜸인 죄목은 바로 ‘손주 보는 재미라도 있으셔야죠.’라는 말을 부모에게 흩뿌리고 다닌 ‘유언비어 유포죄’다.--- p.13
‘황금 이모? 호구 이모겠지.’--- p.16
드라마에는 현실이 있고, 내 동생이 살아가는 현실에는 더더욱 드라마틱한 현실이 꿈틀거린다. 지켜만 보는 사람들은 ‘한 몸에 있는 세 개의 심장 박동’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전에 하나의 심장일 때보다 세 배 이상 무겁고 커다란 심장박동. 그 빛나는 짐들을 들고 정상에 오를 때까지 동생은, 그리고 내 동생을 포함한 수많은 이 시대의 동생들은 숨을 가쁘게만 몰아쉬었으리라.--- p.33
무임승차한 자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법이지만 동생이 탄 열차는 참으로 다양한 풍경을 내게 보여 준다. 나는 지금 동생이 보여 주는 풍경 속에 잠시 머물고 있다. 내 옆 좌석에는 동생이, 그리고 동생의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한 남자가, 그리고 그들 옆에는 쌔근쌔근 두 녀석이 앉아 있다. 그리고 함께 육아 열차에 올라탄 이모 하나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두 녀석들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p.34
내가 승차권 없이 얻어 탄 이 열차는 언젠가 이 네 식구만의 열차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있는 힘껏 이 열차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 아직 이 두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들도 무척이나 많다. 기저귀 한 장면, 트림 한 장면, 배 밀기 한 장면, 뒤집기 한 장면,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하는 그 명장면 들이 내게는 모두 다 소중하다.--- p.34
주말 내내 숙직, 휴일 없는 평일의 시작. 집에 들어온 게 삼 일 만이었다. 가족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가족을 만나는 ‘절대적 시간’ 없이 버텨야 하는 직장은 정말로 퍽퍽했다. 나는 자꾸 무언가 얹히고 있는 내 미래를 느꼈다.--- p.40
2인분의 산책이다. 허리가 잠깐씩 ‘나 끊어질 것 같아’라고 내게 말을 걸어오곤 한다. 그럴수록 나는 내 품을 더욱 세게 감싸 쥔다. 지금 내 품에는 내 품보다 더 커지고 있는 조카 녀석 하나가 동그랗게 안겨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일들이 많다. --- p.43
이런 호구 같으니라고.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이렇게 힘주어 말하겠다. 내 인생에 참견할 사람, 번호표 들고 줄이나 먼저 서시라.--- p.57
아이들은 뱉어 버리고 싶을 만큼 쓰디쓴 약을 먹고 자란다. 어른이 되어서도 쓴 약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종종 나타난다. 어른들은 수시로 복용을 감당해야만 한다. 맛없는 인생을 조금 더 견뎌 볼 것이냐, 맛있는 인생을 찾아 떠날 것이냐. 인생은 조금씩 더 어려운 선택을 우리에게 먹이려 한다.--- p.116
보이지 않게 언니가 휘둘러왔던 폭력이 동생의 이력서에 자꾸 구멍을 만들고 있다. 화려하게 채워 주진 못해도 한 줄이라도 더 보탬이 됐어야 했다. 언니라는 자는 늘 한결같이 불안 불안한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다.--- p.116
동생은 이렇게 계속 동생만 밑지는 장사를 한다. 나는 다소 호구고 상당히 자주 백수였지만, 인생에 있어서만큼은, 특히 동생에게만은 사업 수완이 퍽 좋은 장사꾼인가보다. 오늘도 조카들을 돌보며 오히려 내가 더 큰 은혜를 입는다. 어쩌면 나는 이제 더는 호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p.119
저, 답안지 좀 바꿔 주실래요? 인생 답안 좀 고치려고요.--- p.205
잔잔한 박수 소리가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올라갈 수 있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 충분히 평범하고 충분히 특별한 인생, 누구에게든 잔잔하고 사소한 기회가 찾아간다. 그것만으로 이미 난 충분히 특별하다.--- p.240
마음이 텅 비었을 때, 무언가를 잃었을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고 느낄 때, 그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꼭 내 마음인 것 같이 텅 비어 있는 노트 하나를 손에 쥐고 아무 말이나 닥치는 대로 쓰곤 했다.--- p.244
일희일비했던 모든 순간이 나의 글감이 되고,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온전한 삶이 된다. 내 인생 평생의 단짝, ‘글쓰기’가 나에게 말한다. ‘일희일비’는 오히려 축복이라고. 나 이제 마음껏 일희(一喜)하고, 양껏 일비(一悲)하리라!--- p.245
수천 번, 수만 번의 갑갑함을 뚫고 나오는 것이 ‘말문’이라면 정말 그것은 아주 값진 ‘문(問)’이 될 것이다. 쌍둥이들처럼 쌍둥이의 이모도 지금 막 이 세상에 말문이 트이려고 한다. 이 말문이 트이면 이모도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게 될 듯하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매우 갑갑했으며, 심히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이모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더 자라고 있단다.”--- p.253
책 한 권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나 자신을 하나씩 하나씩 도로 주워 담았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나’라는 조각들이 드디어 이 한 권의 책에 ‘완전체’인 ‘나’로 모였다. 이것은 쓰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또한 이것은 조카들을 지나친 열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세상이었다.--- p.257
짐으로 얹혀 가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어졌다. 그런데도 동생은 그 긴 시간을 두말없이 기다려 줬다. ‘가끔 보면 성질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동생 뒤에서 괜히 흉을 보다가도 내가 가장 힘들 때마다 그 ‘성질’을 전혀 부리지 않고, 침묵으로 나를 응원해 줬던 사실을 기억해 본다. 나는 이 책을 쓰며 그 대단한 사실을 이제야 되살린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