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들리는 영국 고고학의 전통 연구자이고, 공교롭게도 영국 고고학의 이론적 담론의 중심에 있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거석 기념물을 연구하고 있었기에, 자칫 줄리언 토머스(Julian Thomas)나 크리스토퍼 틸리(Christopher Tilley)와 같이 ‘이론 고고학’을 지향하며, 그 일환으로 ‘과거 사회들의 과거 인식’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브래들리는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거석 기념물에 대한 야외 조사와 발굴 조사를 진행해 온 고고학자이다. 그의 이러한 연구 경력은 그의 저술 목록에도 잘 드러나 있다. ---p.12
롱배로 무덤이 세장방형 주거지를 세우는 행위를 환기시켰듯이, 둑길 환호는 취락 전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던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지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종류의 기념물은 흔히 근접해서 나타나는데, 이 둘의 관계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과거를 기념했을 수 있다. 세장방형 주거지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외부 수혈의 배치 양상이다. 이 기다란 수혈들은 주거지의 벽 자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실용적 기능을 가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마치 주거지 내부의 분할 양상을 강조하는 듯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또한 몇몇 경우에는 무덤을 이용해서 그 분할 지점들을 표시하기도 했다. 어쩌면 개별 주거지 주변에 분포하는 분할된 경계선들을 과도하게 실용주의적 관점에서만 접근했던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취락 주변에 분할된 환호를 돌림으로써 그 공간을 과거의 취락과 동급으로 여기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p.88
과거의 유물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논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고학적 분석의 원리를 무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편년의 설정은 ‘밀폐된 유물군(closed groups)’을 확인하는 작업에 의존하고 있다. ‘밀폐된 유물군’이란 한 차례 함께 매납된 일련의 물질 자료의 집합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무덤과 퇴장유구가 있다. 이러한 공반 관계의 연결상을 연구함으로써 개별 유물 형식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입증될 수 없는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매납 유구에 후대에 새로운 유물이 추가된 적이 없다는 상정과, 한꺼번에 매납된 유물이 여러 시대의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p.126
1917년 체코 작가 카프카는 「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그 원고는 완성되지 않았으나, 현존하는 판본은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이것은 기념물 축조라는 현상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것인지를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만리장성의 축조에 관한 것으로, 원래 의도되었던 그것의 성격과, 그것의 축조에 참여했던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 작업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있다. 이야기는 놀라운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만리장성은 북쪽에 있는 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여러 구간별로 축조되었다. 이 구간들 사이에는 텅 빈 넓은 공간들이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만리장성의 축조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공포한 이후에나 메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화자는 그중 일부 공간은 끝내 메워지지 않았다고 의심하고 있다. ---p.173~174
철기시대에 작은 방형 혹은 장방형의 담장시설이 수용된 또 다른 지역이 있다. 그곳은 바로 저지대 영국이다. 이 지역의 경우에는 관련 자료가 해석적 문제를 동반한다. 요크셔 동부 지역에서는 이 시설물이 방형의 봉분을 가진 무덤과 함께 나타나는데, 이 무덤들은 대륙 유럽에서 보이는 형식으로, 그 부장 양상이 유난히 화려하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담장시설 기념물은 그 특징을 규정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연대를 상정하기도 어렵다. 그 기념물 중 일부는 무덤의 일부를 이루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몇몇 사례들은 작은 목축 건물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p.270
1830년대에 다윈이 떠난 여정이 선사시대에 대한 인식을 확립하는 데 하나의 굵은 획을 그었다면, 한 세대 앞서 일어났던 나폴레옹 전쟁 역시 그러했다. 이는 전쟁으로 지중해 지역으로 가는 교통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리처드 콜트 호어 경(Sir Richard Colt Hoare)은 젊은 시절에 여행을 널리 했던 사람인데, 그들 간의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그들의 가족 배경은 매우 달랐다. 다윈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이자 시인이며 발명가이자 과학자였다. 반면 콜트 호어 경의 할아버지는 성공적인 은행가였고 스타우어헤드(Stourhead)라는 정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p.293
다윈의 연구가 인간의 태고성에 대한 정설과의 단절을 의미했듯이, 콜트 호어 경의 윌트셔 봉분묘에 대한 연구 역시 단절을 가져왔다. 두 경우 모두 그 선행 전통은 강력했지만, 몇십 년이 지나자 그들의 입장은 선사시대 고고학의 주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윈의 사고는 시간 축의 연장을 필요로 했는데, 시간은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이 등장했던 그 시점 너머로까지 이어질 필요가 있었다. 또한 콜트 호어 경과 커닝턴의 연구는 순전히 물질 자료만 가지고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대륙의 알려진 유적들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콜트 호어 경은 새로운 방식의 고고학에 집중하게 되었다. 연구자로서의 그의 경력에서 그러한 단절은 큰 학문적 발전의 계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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