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를 받고 두 달 정도 후에는 완전히 대머리가 되었다. 아니 의사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대머리라니. 사실 암에 걸렸다는 것보다 대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유서 깊고 대단하신 안동 김씨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강력한 모발이 싹 다 날아가 버렸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는데 조선 시대였다면 천하의 후레자식이 되어버렸겠지. 좀 억울하다. 대머리인 것도 모자라서 불효라니…….
정말 시원하게 온전한 민머리다. 밀어서 모근이 살아있는 까끌까끌한 대머리가 아니라, 모근 하나 남아있지 않은 온전한 민머리가 되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덥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면 정수리부터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밥을 먹는 데 열중하다 보면 얼굴로 주르륵 떨어지며 흐르는 땀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머리에는 땀이 안 나오게 태어났다고 믿었는데.
민머리가 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삶은 계란이 생각난다. 항암제로 절인 계란은 아무래도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정말 아무런 꾸밈없는 온전한 나를 바라보는 건 신선했다.
세상 모든 일에 백프로 나쁜 일은 없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살펴보면 좋은 점도 보이기 마련이다. 나 또한 새로운 장점을 찾았다. 반들반들한 민머리라서 ‘아차!!’ 같은 리액션을 할 때,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 하고 치면 “착!” 하며 감기는 느낌이 발군이다. 모근이 살아있는 까끌한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 평생을 간직해온 나의 가장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는 건 꽤 좋은 느낌이다.
--- p.19~20
지구가 항상 항암제로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울렁거리고 역겨워서 시도 때도 없이 토를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눈알을 누른 상태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것 같이 시공간이 휘어졌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다고 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토였다. 아침에 흉부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는 2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조차 항상 서너 번씩 토를 했다.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새벽 5시 반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토를 하면서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마치 성실한 좀비처럼.
어느 날 검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도대체 매일 복도에다가 토하는 사람이 누구야아악!” 하며 절규하시는 메아리가 들렸다. 그 순간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토를 하니까 나중에는 위에서 초록색 액체를 꾸역꾸역 게워냈다. 마치 뱃속에서 “들어가는 게 있어야 뭘 내보내지.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라고 말해오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몸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처럼 상식을 벗어났고 기묘했다. 어느 날은 뼛속의 골수까지 시려서 이불을 두 겹이나 덮고서도 벌벌 떨다가, 다음 날이면 혼자 사막 한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얼굴이 벌게져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입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소화기관이 모두 망가져서 며칠을 아무것도 안 먹으며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미친 듯이 배고파서 영양제 두 캔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물론 곧바로 침대에 토해내서 한바탕 소동이 났지만.
--- p.23~24
수술대에 누워있으니 인턴이 와서 녹색 천으로 눈을 가렸다. 수술이 시작되고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상태였는데 천을 완벽하게 가리지 않아서 내 몸을 실시간으로 찍고 있는 엑스레이가 보였다. 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튜브를 몸 안이 보이는 모니터로 지켜보는 건 꽤 그로테스크하다. 의사들도 결국 사람이다.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모든 수술을 진행할 리 없지.
나는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다섯 발자국 정도 뒤에서 의사가 내 몸을 푹푹 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모습을 직접 대면하니까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아서 놀라웠다. 매번 가리고 있으니까, 외면하고 있으니까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아픔은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으로 냉철하게 마주 보면 생각보다 이겨내기 쉬워진다. 아! 수술대 위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하늘 위에서 선녀가 내려와 “이제 옥황상제의 눈을 피해 뒹굴거리던 업을 다 해결하셨으니 저와 함께 올라가시죠”라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삽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스테이플러를 박으며 피부를 봉합하는 중에 부분 마취가 풀려간다.
“앗 땃 따것!!”
결국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아…, 선녀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
--- p.26~27
하루는 병원에서 여자친구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무슨 검사를 받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남들의 시선에 과민 반응하며 날카로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는데 젊은 부부와 5살 정도의 귀여운 남자아이 그리고 눈 한쪽이 부어있는 환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고서 나를 바라보더니 똘망똘망하고 큰 목소리로, 옆에서 아이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머리가 없어?”
너무 당당해서 마치 ‘안녕하세오! 저는 몬테소리 유치원 햇님반 김○○입니다!’라며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순간 주변의 모두가 당황스러워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머머머, 얘 왜 이러니, 왜 이러니!”라며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회색 롱 코트를 입고 있던 젊은 남편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구석의 환자는 끔뻑거릴 수 있는 부어있지 않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푸하하.”
그리고 나는 유쾌함에 소리 내어 웃었다. 발가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는 보이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고 말 속에는 어떠한 의미도 조롱도 없다.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을 뿐. 괜찮다고 말한 후에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아이는 계속 바라봤고 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 후부터는 사람들이 흘끗거려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하늘에서 나에게 보내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 p.29
투병생활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이 이렇게나 애매하게 섞여있을 수도 있음을 느꼈다. 심장은 꾸준히 살아가는 중이지만, 암 환자가 된 순간 나는 동시에 ‘죽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암 환자로 살아가는 인생은 마치 ‘아포가토’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아이스크림처럼 마냥 달달한 상황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하기만 한 인생을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게 한없이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달달함과 씁쓸함의 경계에 있는 애매모호한 인생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내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조금은 빠르고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물론 함께해서 더러웠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럭저럭 감사했다 말하고 싶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운명에 행복이 별처럼 작지만, 촘촘히 박혀 있었던 투병생활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암에 걸렸다고 세상 끝났다는 듯이 눈물만 흘리기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보다 훨씬 힘들고 어렵게 투병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았다. 암은 불치병과는 다르게 그나마 치료 가능성이 있는 병이기도 했고.
--- p.51~52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할 때면 가끔 장미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사실 꽃을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집에 장식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꽃을 집에 둔다는 것이 그녀의 뿌리를 서슴없이 동강동강 자르고 가시를 뽑은 뒤, 이파리도 툭툭 뜯어내고선 물에 담가 생명을 유지시키며 그 아름다움에 흡족해하는 행위라 생각할 때면 썩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기계적으로 도축된 고기, 온갖 과일과 채소 또한 즐겨 먹기는 해도, 물병에 담겨 생명을 유지하는 장미꽃을 볼 때마다 수액과 항암제로 생명을 유지하던 내가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맞는지,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꾸 불안해서 이파리를 쓰다듬었다가 혹시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봐 얼른 손을 떼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이렇게나 신경 쓰이는 일이라니.
--- p.95
수많은 항암치료를 거듭하면서 얼굴이 많이 망가졌다. 코 부근에 혈액암이 발병했기에 항암제를 투여하면서 코 연골을 비롯한 주변의 지방세포까지 모조리 죽어버렸다. 뭐 애초에 얼굴로 먹고살 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조인성이나 강동원의 얼굴에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면 외모의 갭이 롯데타워 정도의 나락이기에 충격으로 즉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뭐랄까 후하게 쳐주어도 아파트 3층 높이 정도의 격차이기에 떨어지더라도 발목이 삐끗한 정도의 아픔이려나. ‘아… 아프다’라고 생각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버리고 제 갈 길 가면 그만인 것이다.
--- p.99
코뼈가 암으로 썩어서 그 썩은 냄새가 코를 통해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 후 조직검사를 통해 암 진단을 받았고 이미 썩어버린 코뼈 대부분을 제거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군대의 선·후임들은 그저 ‘샤워는 열심히 하지만 이를 잘 닦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좀 우습기도 하다. 샤워는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하지만 이를 안 닦아서 썩은 내가 나는 사람. 나는 그런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강한 항암제를 사용하는 동안 축농증도 많이 호전되었고, 후각이 꽤나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돌아왔다기보다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적이 있다. 어느 날 병실로 들어온 어머니에게서 인공 바나나 향이 났다.
“엄마 어디서 바나나 향기가 나는데? 약간 화학조미료 같은…….”
알고 보니 1층 로비에서 바나나우유를 드시고 올라오셨단다. 어쩐지 우쭐해졌다. 물론 그 직후, 온종일 굶는 나를 조금이라도 먹여보겠다며 가져온 볶음김치 냄새에 몇 시간을 토해대는 바람에 볶음김치에 대한 거부감이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렸기는 하지만.
요즘도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가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덕분에 궁금했던 비 냄새도 맡아보고, 풀향기라는 것도 느껴보았다. 향수를 뿌리고 온 친구한테 “야! 오늘 너한테서 좋은 향기 난다!” 며 칭찬도 해줄 수 있고. 그런 날은 온종일 뿌듯하다.
나는 ‘향’에 대한 로망이 있다. 어쩌면 내가 평생을 자유롭게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런 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많은 부분을 향으로 인지하고 기억하며 살아간다. 좋아하는 향기가 나는 글들이 있다. 쓸쓸한 향기를 가진 추억들도 있다. 비겁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도 있고, 서글픈 향기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게 무슨 냄새예요?”라고 물어본다면 나 역시 그때의 친구처럼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며 대장금이 되어버리겠지만.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