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Preludes Op.28 15번 곡, 흔히 빗방울전주곡이라고 하지. 내가 보통 비가 오길 바랄 때 치는 곡이거든.”
그 후에 소녀는 좀 전까지의 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음악 감상이 끝났으면, 이젠 나가 봐.”
“방해해서 미안해.”
차갑게 내치는 태도에 불쾌감을 갖진 않았다. 정원은 사과한 후에 뒤돌아섰다.
삐그덕 삐그덕! 쾅쾅쾅!
아래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누구일까. 정원은 다시 소녀 쪽을 보는데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이런 폐교 같은 데서 혼자 있는데 무섭지 않은 걸까. 하지만 어떤 관심도 사양한다는 소녀의 태도를 상기하며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낯익은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울려왔다.
“문정원, 이놈 잡히기만 해라.”
학생 주임이 그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정원은 깜짝 놀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창문을 빌리는 정도라면 들어와도 좋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무슨 말인지 몰라하는데 소녀가 무심한 얼굴로 창가를 가리켰다.
“요령만 있으면 죽진 않을 거야.”
“뛰어, 내리라고?”
저 청초한 얼굴로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학생 주임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정원은 숲을 뚫고 나온지라 엉망이 되어서 이젠 들어 올리기조차 힘든 발목을 질질 끌며 음악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 냄새를 담은 바람이 들어왔다. 정원은 양손을 펼쳐서 창틀을 붙잡고 아래를 봤다. 4층 높이는 뛰어내리기에는 무리인 듯,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바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소녀가 그의 뒤에 와 있었다. 그녀는 정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정원, 이놈이 쥐새끼처럼 여기까지 도망 와?”
학생 주임은 다친 몸으로 뒷산을 넘더라는 학생의 증언을 듣고 이곳까지 찾으러 왔다. 얄팍하게 그를 속아 넘기려 한 정원에 대한 분기로 얼굴이 씩씩 달아올라 있었다.
“기분 나쁜 새끼. 감히 선생을 속여? 어디 오늘 한번 보자.”
그가 음악실 문을 열었다. 넓은 음악실 안은 조용했다. 찬찬히 고개를 움직이는데 창문을 닫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을 뒤져볼 요량으로 한 걸음 막, 떼려던 차였다.
“그만둬요.”
뒤돌아 있는데 어떻게 움직임을 읽은 건지 소녀가 학생 주임을 막았다.
“잠깐 음악실 좀 살펴보마.”
“실례도 구하지 않고 여기에 오다니, 예의가 없는 사람이군요. 난 여기에 오는 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어요.”
학생 주임은 조금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이쪽으로 위험인물이 왔다는 얘길 듣고 네가 걱정돼서 찾으러 온 거야. 악질 같은 녀석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여기에 너 혼자 있는데 그놈이 악심을 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도와줄 사람도 바로 오지 못하는데.”
“만약 여기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그건 누구보다 내가 더 빨리 알아요. 입구부터 불쾌한 소리가 들리거든요. 하지만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어떤 불쾌한 소리도 없었어요.”
소녀가 차갑게 대꾸하자 학생 주임의 얼굴이 분기로 가득했다. 학생 주임은 그녀의 등을 무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이어 소녀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나쁜 기를 내보이면 난 무심코 호출할 수밖에 없어요. 알고 있겠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사견 훈련장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그 애들을 무서워하는데, 나를 무척이나 잘 따르는 아이들이거든요. 내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면, 바람처럼 달려오겠죠.”
학생 주임은 얼어붙은 듯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소녀는 뒤로 돌아섰다.
“한 번만 더 말하죠. 나가요.”
차가운 경고에 학생 주임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내려가는 동안에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쁜 년, 감히 선생한테. 독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는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선도부원들을 모아 화풀이로 정강이를 발로 한 대씩 찼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찾아봐!”
곧 선도부원들을 이끌고 구교사 부지를 빠져나갔다.
소녀는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방벽이 되어서 정원의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키가 큰지라 몸을 숙이고 있는 동안 힘들었을 것이다.
소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네가 위험인물?”
“미안. 금방 나갈게.”
정원은 얼굴을 붉히고 서둘러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에 체중이 쏠리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는 싫지 않으니까 서두를 건 없어.”
“좀 전엔…….”
소녀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넌, 내게 선물을 가져다줄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녀는 대꾸하지 않고 창문을 바라보는 채 그대로 있었다. 정원은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 그녀를 따라 창가에 시선을 돌렸다.
톡. 톡.
뭔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정원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창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손님이 존재를 드러냈다.
투두둑, 투둑.
빗줄기가 조금씩 두꺼워졌다. 정원은 놀란 얼굴로 소녀를 봤다. 사라지고 이젠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던 소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응시했다.
“맞지?”
“비는 내가 오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한 번도 내가 바랄 때 비가 내린 적이 없어. 지금까지는.”
“우연이겠지.”
“오늘 강수 확률 0퍼센트.”
소녀는 피아노 의자에 앉으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발목, 병원에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우선 그거라도 묶고 있어.”
“난 괜찮아. 손수건이 더러워질 거야.”
정원이 사양하자 그녀는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내 발목을 칭칭 감쌌다.
“요령이 없구나? 너.”
온통 멍투성인 자신의 몸과 소녀의 새하얀 손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자 정원은 창피한 기분이었다.
“이제 됐어.”
“누가, 진짜 위험인물이야? 너? 아니면…….”
소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좀 전에 연주했던 빗방울 전주곡이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아름다운 선율이 어우러졌다. 정원은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왠지 그의 마음마저 슬퍼지는 음색에 어떤 표현할 말도 떠올리지 못했다.
더 이상은 어떤 게 빗소리이고, 어떤 게 피아노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저 한데 뭉쳐서 그의 마음에 잔파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소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빗방울의 울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마도 첫 만남의 여운 때문일 것이다. 구교사를 들어서는 순간, 현실 같지 않은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구교사에 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정원은 그 후로부터 빗소리를 좋아하는 소녀에겐 차마 얘기할 수 없지만, 비가 내리지 않기를 매일 소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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