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무릎쓰고 버만이 밤새도록 그려둔 담쟁이 잎새를 보며 존시는 회복의기미를 보이지만, 정작 그걸 그린 버만은 급성 폐렴에 걸려 죽고 만다. 언젠가는 걸작을 그리겠다던 버만 노인은 결국 자신의 마지막 그림을 통해 막 꺼져가던 젊은 생명을 구함으로써 '삶'이라는 보다 차원 높은 예술을 남긴다. 실패한 예술가 버만의 삶이 뛰어난 예술작품에 바쳐지는 그 어떤 아름다운 헌사보다 더 큰 울림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O. 헨리는 나다니엘 호손, 에드가 앨런 포우에 의해 수립된 미국 단편소설의 전통을 계씅, 발전시킨 중여한 작가다. 삶의 곳곳에 포진한 불행과 비참들을 우수어린 해학과 기지로 담아내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잃지 않았던 것은 O. 헨리 소설의 가장 큰 미덕으로 평가받는다.
--- p.101-102
한 세상살이에서도 꺼지지 않는 따뜻한 인간애,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뒤덮인 대지를 살아가야 하는 결핍과 고통 속에서도 용케 지켜지는 순수와 서정 같은 것들은 인간이 그래도 사랑할 만한 존재임을 증거한다. 그것은 도덕이나 윤리처럼 배워서 익힌 것도 아니고 의도적인 선(善)처럼 노력과 참을성에 바탕한 것도 아니다. 다만 타고난 그대로를 보존했을 뿐인 인간성의 양지(陽地)이다. 여기서는 그런 것을 주제로 삼은 열 편의 명품을 골라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이란 제목 아래 묶어본다. 삶의 비극성을 냉철히 인식함으로써 더 충실한 삶을 채워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사소하더라도 사랑하고 살 만한 이유들을 찾아내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소중한 문학의 몫이 될 것이다.
--- p.19
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가난해서 오히려 눈부신 인정. 궁핍하지만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한 부부의 삶을 통해 장엄한 비극성을 능가하는 소박한 선의를 드러내는 서사시.
우고 와스트의 「고향에 돌아온 죄수」:우리 밖 한 마리 양이 주는 감동. 선량한 행동을 기대하지 않았던 대상의 착한 마음씨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감동을 이야기한 소설.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 살 만한 세상. 선(善)을 향한 작가의 진지한 열정을 보여주는 소설.
O. 헨리의 「마지막 잎새」:걸출한 그림보다 아름다운 `삶`이라는 예술혼. 실패한 예술을 사랑으로 완성해내는 어느 화가의 이야기.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사랑의 아름답고 깔끔한 변주. 이성을 향한 순수와 서정이 인간애로 고양되는 과정을 보여준 소설.
존 스타인벡의 「빨간 망아지」:불통(不通) 속에 단련되는 유년의 순수.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을 배워가는 한 소년의 성장기.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순수하고 고양된 유미주의(唯美主義)의 결정(結晶). 선을 향한 작가의 만만치 않은 믿음을 동화적 알레고리로 포장한 소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순수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서정. `어머니`라는 이름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노래한 소설.
가브리엘 G. 마르께스의 「눈 속에 흘린 당신 피의 흔적」:어처구니 없고 무지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젊은 영혼들의 파국을 그린 소설.
네나 다콘테는 화장실에서 블라우스와 치마에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피의 얼룩을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로 적셔진 손수건을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끼고 있던 결혼 반지를 왼손에 바꿔 끼고는 상처난 손가락을 비누로 깨끗이 씻었다. 찔린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차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네나 다콘테는 전원의 찬공기가 피를 멎게 하지 않을까 해서 창문에 팔을 내밀었다. 이 노력도 별 효과가 없었다.
--- p.244 pp.2-9
깊이 모를 심연과도 같은 인간성은 삶의 여러 국면을 프리즘 삼아 다양하게 분광한다. 그 여러 빛깔 중에서 진지한 예술은 대개 비극성의 어두운 색조에 관심을 가진다. 존재의 근원적 허무에 대응하는 고뇌들, 원색의 욕망, 허영과 어리석은 고집들,이기심, 그리고 잔혹함과 공격성 같은 것들이 빚어내는 파국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진지함이 반드시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과 연관이 있다는 믿음은 미신이다. 진지하면서도 인간성의 밝은 측면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단편소설을 놓고 보면 한때는 국정국어 교과서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친숙했으나 요즘은 왠지 소외되고 있는듯한 알퐁스 도데나 O 헨리 등이 그 대표적 예가 될것이다.
---제10권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