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음 날 저녁. 이번에도 동료들이 야근을 위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있을 때, 나는 피아노 학원 건물 1층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삼각 김밥 두 개를 사서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 그걸 들고 다시 학원으로 올라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삼각 김밥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길은 어떻게 해서든 찾아지게 마련이다. 그 와중에도 삼각 김밥은 ‘전주비빔’과 ‘매운 참치 김치’가 최고라는 사실을 알아낸 건 부수적인 성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였다. 저녁 사 먹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삼각 김밥으로 연명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내 모습은 마치 통속적인 드라마에 나오는 가난한 뮤지션처럼 보였다. --- p.17
SUNDAY 28th PYRAMID STAGE OASIS “시간표군요.” 데이비드는 마치 시험 감독관처럼 내가 이 문제지를 스스로 풀기를 바라며 가만히 기다리는 듯 보였다. “라인업인가요? 록 페스티벌?” 데이비드는 거의 정답에 가깝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펜타포트? 펜타포트에 오아시스가 오는 건가요? 와우.” 데이비드는 살짝 주춤하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닌가요? 펜타포트가 아니라면 뭘까? 설마 글래스턴베리 뭐 이런 데는 아닐 거고.” 글래스턴베리. 그 단어가 나도 모르게 발성기관을 통해 저절로 흘러나왔다. “글래스턴베리. 너도 그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라고 주연은 말했었다. 글래스턴베리. 전 세계 음악 팬의 성지. 몇 년 동안 일부러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잊히기를 바랐던 단어, 글래스턴베리. 그 단어가 데이비드의 청각기관에 닿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걸 알아챘다. “글래스턴베리?” 나는 재차 확인했다. 데이비드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어느새 내 말투가 반말로 바뀌었다. 데이비드는 역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헐, 레알?” 내가 잘 쓰지 않는 두 단어가 연달아 나왔다.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할 때면 쪼르륵 달려와서 구경하는 꼬마 형제가 잘 사용하는 단어였다. 이성적 사고 능력보다는 감성 체계가 지금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데이비드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레알, 엄창.” 그는 엄지손가락을 이마에 찍었다. 이 영국인은 도대체 이런 한국말을 어디에서 배운 걸까. 멋쩍은 듯 데이비드가 헛기침을 했다. (중략) “그러니까 나한테 올해 글래스턴베리에 가라는 건데, 만약 제가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죠?” “딱히 어떻게 되지는 않겠죠. 다만 글래스턴베리에는 하나의 분기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분기점을 지나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치명적이고 위험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주가 당신에게 펼쳐질 게 확실하거든요.” --- p.51
장벽 끝에서 돌아서니 비로소 페스티벌의 내부 모습이 눈앞에 들어온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축제 참가자는 총 15만 명. 글래스턴베리 행사장 주변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전혀 없다. 웬만한 중소 도시의 인구와 맞먹는 이 사람들이 모두 페스티벌 부지 안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해야 한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들도 캠핑을 한다. 당연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글래스턴베리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이쪽 산에서 저쪽 산꼭대기까지 모두 텐트로 뒤덮여 있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감탄사만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글래스턴베리가 뭐라고 이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여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도시의 형성 원리를 절로 깨닫는 느낌이었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미리미리 중심지와 길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찾아가기도 힘든 높은 지대에 겨우겨우 자기 몸 누일 곳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글래스턴베리는 겨우 하루 만에 거대 도시로 팽창했다. --- p.175
어떤 진실. 그래 나는 어떤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도대체 존재하는지 모르겠고, 그 정체가 어떤 것일지 어렴풋한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진정한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 흔적이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주연을 만난 순간에도 그런 펄떡거림을 느꼈던 것 같다. 밴드를 한 것도,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도, 어떤 펄떡거림이라는 걸 찾고 싶었던 것이다. 회사를 그만둔 것도 내가 살아서 숨 쉬는 존재라는 걸 부정당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펄떡거리며 살아 숨 쉬는 걸 느껴 보고 싶었던 거다. 글래스턴베리가 나에게는 그런 곳이었다. 글래스턴베리에 가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펄떡거림을 느껴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 그래 이제야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아.’
살다 보니 힘드신가요? 매일매일 출근하는 생활 힘들죠? 상사에 치이고 동료 눈치 보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사표를 과감하게 던질 용기는 없고. 짜릿한 사랑도 꿈꾸는데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다 답답하네요. 그렇다면 이 책을 들고 눈앞의 문장을 가만히 그려보세요. 당신을 대신해서 뒷감당 못 해도 좋을 청춘의 미덕을 주인공이 보여줄 테니까요. 아 참, 다 읽고 사표는 쓰지 마세요. 휴가 쓰고 글래스턴베리로 날아가는 센스! 이성우 (노브레인 보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