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보위에 오른 덕종이 유안을 남달리 의지하고 중용했던 것은 큰일을 하는 데 재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안 역시 날로 어려워지는 현실에 맞서려면 나라의 살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성적에 만족하지 않고 이보다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성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정 정책을 독점하게 된 유안은 세제 개혁으로 시선을 돌렸다. ---p.42,〈서장 찬란한 제국에 암흑이 드리우다〉 중에서
왕숙문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자신에게 내려질 부귀영화나 막강한 권력에 눈독 들인 소인배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큰일을 하고 싶었던 왕숙문의 머릿속은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나는 재정, 나머지 하나는 군사였다.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자신의 뜻을 펼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서, 왕숙문은 해당 분야의 인사 정책을 꼼꼼하게 계획했다. (중략) 이에 반해 군사 문제는 천하의 왕숙문도 쉽게 손대지 못했다. (중략) 현재 중앙의 금군을 호령할 수 있는 권한이 환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데다 지방의 번진 역시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한 터라, 이 문제는 왕숙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p.162~163,〈제1장 왕숙문_천하태평의 꿈을 꾸다〉 중에서
당나라 조정에서 지식인에게 제공한 공평한 수단이 상대적으로 엄격한 과거 제도였다면 무장이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는 전쟁에서 세운 공훈이었다. 대외적으로 환관은 관품을 받았지만 사실 그들은 일개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중략) 신책군을 손에 넣은 환관에게 추밀사의 등장과 부상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중략) 업무적 특성상 추밀사는 직책을 통해 환관은 훗날 군권을 장악한 것은 물론,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도 손에 넣었다. ---p.315,〈제3장 신책군과 추밀사: 역전의 명수〉 중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인성에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이덕유, 우승유와 달리 이종민은 고집이 세고 고압적이었다. 양측의 나머지 무리들은 ‘철새’처럼 이해에 따라 이편저편 패가 갈렸다가도 다시 합치기 일쑤였다. 이종민, 우승유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종종 이덕유 쪽에 서기도 했다. (중략) 문제를 좀더 단순하게 살펴본다면 조정 내 당파 싸움은 개인적인 은원에서 파생된 파벌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하겠다. ---p.470, 〈제5장 이종민, 우승유, 이덕유: 9세기 정치 무대를 이끌다〉 중에서
무종이 붕어하고 당시 서른여섯 살의 황태숙, 즉 광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선종’이다. 인내의 승리, 의지의 승리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낮은 곳에서 내공을 쌓은 끝에 주변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나를 아는 자가 드물고, 나를 따르는 자 또한 귀하다. 성인은 거친 베옷을 입고 있어도 속에는 옥을 품고 있도다.”
선종은 자신을 통해 노자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회창 중흥의 주인공 이덕유, 빚지고 못 사는 이종민, 제 밥그릇 챙기는 데 집착한 우승유, 몸을 낮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백민중 모두 선종 황제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p.516, 〈제6장 선종: 최후의 영광〉 중에서
경제 불안, 부패한 정권 때문에 중앙 정부의 위엄이 예전과 더 이상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관군의 규모나 전투력 모두 약세에 처한 탓에 중앙 정부는 반란을 진압할 때 반드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지방의 자체 무장 세력에게 크게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천자와 제국의 위엄이 크게 실추된 상태에서 과거처럼 왕을 보좌해 종묘사직을 지킨다는 전통 관념은 이미 오래전에 그 힘을 잃었다.
---p.591,〈제7장 붕괴: 역사의 내리막길을 걷다〉중에서